몇 차례의 일정 조율 끝에 드디어 계약 날짜를 잡았다. 혼자 갈까도 생각했지만, 아내와 7살 둘째 아이를 대동하기로 하였다. 먼저, 이 토지는 아내와 공동명의로 계약할 예정이다. 아내와 함께 모은 돈으로 시작하는 소중하고 떨리는 발걸음이기도 하고,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혹시 모를 우리에 대한 매도인의 경계심(?)을 조금이라도 누그러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매도인은 네 분이 함께 나오셨다. 80대 후반의 어르신, 자제분 세 분. 자제분들이라고 하지만 우리 부부보다는 훨씬 높은 연배였다.
그리고 부동산 실장님, 대표님.
많지 않지만 경험을 비추어보면 이런 자리에서 무슨 말이든, 말을 꺼내기가 참 어렵다. 계약은 매도인과 매수인이 서로 금액과 조건에 대한 조율을 마친 채, 만나는 자리다. 나는 이 매수 금액에 만족한다. 하지만 매도인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마음에 드는 가격은 아니지만, 팔아야하니까 아쉽지만 승낙했을 수도 있다. 가격은 상대적이기에. 매도인은 많이 받고 싶고, 매수인은 적게 내고 싶어하는 것이 계약이다.
그래서 짐짓, 가격은 비싸지만 이 물건이 꼭 필요해서 무리에 무리를 하면서 힘겹게 매수를 하는 그런 매수인의 표정으로 앉아있는 것이다. 매수인이 싸게 사서 좋아하는 표정을 보면, 어떤 매도인이 좋아할까. 사실 힘겨운 매수가 맞기도 하다. 우리에게 얼마나 큰 돈이 있을까. 가진 돈은 그저 계약금 정도이다. 나머지는 대출로 충당될 예정이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혹시 신축을 하실건가요?" "... 네, 사실 금리도 자꾸 높아지고, 신축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닌데, 저희가 신축을 꼭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걱정이 한가득인데, 어려운 상황에서도 도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분들이 대단하네요."
그리고 또 침묵. 부동산 실장님이 들어와 간단한 인사를 하고, 특약사항을 설명해주었다. 여기에 오기 전에 이미 조율된 내용이다.
기다리기 지루한 둘째아이는 종이 뒷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다만 잔금 일정을 조금 조정을 하는데 성공했다.
"잠시만요, 매도인쪽에서 내년 2월말까지 지금 거주 중이신 분들의 명도를 완료해주신다고 하셨는데요" "네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잔금을 3월 말에 하는 것은 용도변경을 해야해서 저희가 촉박할 수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미 협의된 내용 아닌가요?" "아마 부동산 통해서 오가면서 조금 정확하지 않았던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2~3주 정도만 여유를 더 주시면, 진행에 따라 일정을 당기는 한이 있더라도 매수 쪽에서는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일처리만 잘 되면, 나중에 당기는 조정을 할 수도 있다는거죠?" "네 그렇습니다. 부탁 드립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시죠. 잔금이 원할하셔야 저희도 좋으니까요." "감사합니다."
부동산에서 양측의 인적사항을 정리하여 계약서를 출력해왔다. 매도인쪽에서 먼저 계약서를 읽어보시더니 직접 도장을 꺼내서 찍기 시작했다. 몇 번 부동산 계약을 해봤지만, 부동산에서 아무 말이 없는데도 먼저 매도인이 도장을 찍는 건 처음있는 일이다.
'빨리 매도를 하고 싶으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동산에는 우리(매수인)는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도장을 건넨다.
"저희가 찍어드려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해주십시오"
"사실 저희가 올해 초에도 매도를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매수인쪽에서 요구하시는게 부담스러워서 안 팔았어요." "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저희에게 기회가 왔다니 감사한 일입니다." "근데 똑같은 요구를 하시는데 이번에는 매도를 하게 되었네요. 정말 임자가 있나봅니다." "저희가 좋은 타이밍에 매도인 분들을 뵙게 되었군요. 이 또한 복인 것 같습니다." "그러게말입니다. 임자에게 갔으니, 좋은 결과 있으시면 좋겠습니다. 잘 되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그 말씀 듣고나니 마음이 좋습니다."
매도인은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덕담까지 해주는 경우는 결코 흔치 않다. 어쨌든 그 마음이 고마운, 따뜻한 계약이었다.
차분히 부동산의 날인을 지켜본다. 그리고 계약금을 송금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계약이 이렇게 진행된다. 마음 속에서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한다.
'수많은 검토를 했고, 신축을 하겠다고 결심을 했어. 그리고 이 토지는 우리가 찾은 좋은 조건의 토지야. 꼭 계약해야만 해"
이제 계약 절차는 마무리되고 있다. 앞으로 몇 달, 또는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릴 일들. 아직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일들. 미지의 세계가 펼쳐지겠지만 이겨나가야 할 시간이 오겠지. 아내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안정된, 그리고 확신에 찬 눈빛을 보내주어야 한다. 나에게도 걱정이 없지 않지만 꿋꿋이 이 결정을 밀고 나가는 이유는, 두려움보다 절박함이 더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