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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 소나무 Jan 11. 2023

이불속 살냄새

(21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지난 주말, 애틀랜타에 사는 사촌오빠네 집을 다녀왔다. 미국에 사는 동안은 오빠네 집이 내겐 친정이다. 나와 같은 핏줄을 가진 친족이 한 명이라도 같은 하늘아래 산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큰 위안인지 모른다. 버지니아에 살던 오빠네 가족은 지난해 여름, 조지아로 이사 오게 됐다. 덕분에 우리 집에서 차를 타고 4시간이면 충분히 닿을 거리가 됐다.


오빠네 집에 도착하면 차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달려 나와 우리를 반겨주는 쪼꼬미 두 명이 있다. 한 달 전 막 7살이 된 조카 1번과, 누나와는 딱 600일 차이가 나는 조카 2번이 그 주인공이다. 조카 1번은 고모인 나를, 조카 2번은 고모부를 너무 좋아한다. 자신과 더 많이 놀아줄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는 것 같다. 서로 같은 사람을 원하면, 그만큼 자신과 놀 시간이 줄어들 테니 말이다. 영악한 나의 조카들 같으니라고.  


사실 내게 조카 1번은 나와 가장 유대관계가 깊은 조카이다. 이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쯤 지났을 때, 나는 오빠네 집을 한 달간 머물 기회가 있었다. 덕분에 이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짧지만 잠시라도 볼 수 있었다. 그 작고 연약한 몸을 안고 있으면 그 아이의 체온과 더불어 살 냄새가 느껴졌다. 우리가 흔히 아기냄새라고 하는 아기들 특유의 포근한 향 말이다.

아기냄새~ 출처: pixabay


사실 이때 내가 경험한 한 달은 나의 결혼관과 인생관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건이었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내게 가장 최우선이 됐던 가치는 당연하게도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원하는 직업을 갖고, 결국엔 커리어 우먼으로 성공하는 것이 내가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까닭이었고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엄마가 되는 삶도 행복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스스로에게도 놀랐다. 동시에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왔는가 현타가 왔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산다고 해서, 설령 그래서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뤘다고 하더라도 그게 정말 행복한 미래일지는 알 수 없는 건데. 나는 미래에 있을 막연한 행복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구나란 생각에 도달했다. 또, 그렇게 얻은 행복은 내가 한 달간 오빠네 집에서 머물며 느꼈던 행복과는 결이 다른 것임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현재의 나는 나의 커리어를 택하는 대신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왔다. 아마 그 해 여름이 경주마처럼 한 곳만 보며 쉴 새 없이 달리던 나에게 제동을 걸었던 것 같다. 한 곳만 보지 말고 더 멀리 보라고, 인생엔 더 중요한 가치들도 많다는 걸 깨닫게 해 주며 말이다. 아이는 어른을 자라게 하는 마법을 지닌 것 같다.




우리가 오빠네 도착한 날 밤, 조카 1번은 나와 함께 자겠다고 선언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약속했던 걸 까먹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러자 옆에 있던 조카 2번도 그럼 자기도 고모부와 잘 거라고 한 술 더 떴다. 그래서 그날 밤엔 우리 넷이 한 침대에서 자게 됐다. 조카 1번은 내 옆에서 조카 2번은 나와 남편 사이에 누웠다. 그렇게 나는 양 옆에서 조카들의 온기를 받으며 자게 됐다. 조카 1번은 아기일 적 그랬듯 나에게 폭 안겨 잠을 청했다. 그러자 6년 전 느꼈던 그때와 똑같은 아이의 온기와 체취가 느껴졌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 체온을 나눠줄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었구나’하는 생각 말이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 나도 내 조카들처럼, 할머니네 집에 가기만 하면 할머니와 잠들고 싶어 했다.


아직도 나는 할머니 냄새를 기억한다. 할머니가 잠들기 전에 늘 발랐던 니베아 크림과 할머니의 살냄새가 섞여 할머니만의 포근한 향을 만들어내곤 했다. 할머니의 피부는 약간 까무잡잡했는데 그래서인지 살결이 정말 부드러웠다. 눈을 감고 할머니의 따뜻한 품에서 할머니의 부드러운 팔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금세 잠이 들곤 했다.


할머니네서 잠이 들면 이른 새벽 눈이 떠지곤 했다. 부지런한 할머니가 새벽 4시면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하시기 때문일 수도 있다. 칙칙 거리며 돌아가는 압력밥솥 소리와 할머니가 야채를 써는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아침준비를 대강 마친 할머니가 방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티브이를 보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할머니는 나의 학교생활을 궁금해했고, 엄마에 대한 고민이 있으면 털어놓게 했다. 나는 주로 할머니가 겪었던 전쟁이야기나 할머니가 알고 있는 재미있는 옛날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할머니는 이야기꾼이었고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알고 계셨다.


이렇게 둘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면 금방 해가 떴다. 맛있는 아침밥을 먹고 나선 청소하는 할머니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도 도울 수 있다고 걸레를 들고 선 말이다. 아마 할머니에게 칭찬을 받고 싶은 욕구가 커서 했던 행동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닦아 달라고 지시하셨다. 중간중간 추임새로 칭찬을 한 번씩 날려주는 건 보너스였다. 산뜻한 아침이었다.


출처: pixabay


어린 시절 내가 할머니의 온기가 필요했듯, 나의 조카들도 나의 온기를 필요로 했다. 할머니네서보낸 밤은 평범한 일상 중 하나였을텐데 어른이 되고 나니 그 어떤 날들보다 특별했던 날로 기억된다. 조카들과 자주 보진 못하지만 미약하게나마 그들의 유년시절 속 행복했던 기억의 일부가 되고 싶다. 먼 훗날 그 아이들도 갑자기 고모와 고모부와 잠들었던 그 따뜻했던 밤이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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