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한국에서는 기온이 영하권으로 뚝 떨어져 한파와 폭설에 대해 대비해야 한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반면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아직도 영상권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밖에 나가면 바람이 차갑긴 하지만 아직은 보송한 바람이다. 겨울을 싫어하는 내겐 천국 같은 곳이다.
그런데 지난주, 남편이 시카고에서 열리는 미국 지구물리학회(AGU)에 참석할 일이 생겨 일주일간 시카고에 다녀왔다. 거대한 미시간 호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 때문인지 ‘윈디시티’라는 별명이 붙은 시카고이다. 추운 겨울과 매서운 바람에 대한 악명 때문일까, 나는 가기 전부터 잔뜩 걱정이 앞섰다. 겨울에도 얇은 파카 하나면 만사 오케이인 곳에 적응한 탓에 시카고의 매서운 바람이 얼마나 차가울지 가늠이 안됐다.
시카고에 내리자마자 나는 겨울 냄새를 맡았다. 우리 동네에서는 겨울이 되어도 쉽게 맡을 수 없는 겨울의 향기였다. 이 냄새는 즉각 한국의 겨울을 떠오르게 했다. 예전에 과학 저널에서 읽은 기사에 따르면 냄새는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더 강하게 기억을 자극할 수 있다고 한다. 냄새를 맡으면 후각 자극을 처리하는 뇌의 영역 활동이 촉발되는데 이 영역이 기억을 담당하는 영역과 가깝기 때문이라고 한다.
겨울 냄새를 맡고 한국의 추운 겨울이 떠오르자, 나는 겨울을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물론 추운 날씨, 야외 활동이 제한적이라는 점, 두꺼운 옷을 겹겹이 껴입었을 때 느껴지는 답답함 등이 표면적인 이유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겨울 자체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감정이 안 그래도 추운 겨울을 더 냉랭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자 마침내 그 답을 찾게 됐다. 나에게 겨울은 실패의 계절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미국은 11월엔 땡스기빙, 12월엔 크리스마스로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홀리데이 시즌이자 따뜻함이 느껴지는 계절이다. 반면 한국의 겨울엔 11월엔 수능이, 12월엔 새해에 목표한 바를 다 이루지 못했다는 패배감이 밀려드는 달이다. 내게 가장 추웠던 첫 번째 겨울은 고3이 끝나던 해였던 것 같다.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지 못했다는 패배감과 인생 처음으로 맛보는 쓰라린 실패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성인이 된다는 설렘과 함께 찾아온 이 무력감은 내게 처음으로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란 걸 깨닫게 해 주었다. 그 이후에도 편입학 시험 또한 겨울에 치러졌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는 12월부터 1월까지는 지원한 학교의 수만큼 시험을 치러야 했고, 2월엔 결과를 기다리며 마음 졸이는 심판의 날들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너무나 추웠던 겨울들이었다.
그래도 겨울 냄새를 맡으면 떠오르는 따뜻한 기억도 있긴 하다. 이러한 기억의 끝엔 항상 할머니가 있다. 겨울에 할머니네 집에 가면 쿰쿰한 메주 냄새가 가득했다. 할머니는 고추장과 된장, 간장을 집에서 직접 담그셨기 때문에 겨울이면 콩으로 만든 메주가 집안 곳곳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나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쩍쩍 갈라진 메주 틈 사이엔 곰팡이가 가득 피어 있었다. 이에 나는 저절로 손을 올려 코를 막았고 인상은 찌푸려졌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이게 다 맛있어지는 거다"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시곤 했다. 겨울이면 항상 입으시는 검붉은 색의 깔깔이 조끼를 입으시고 꽃무늬 버선을 신으신 채 말이다. 그 지독했던 메주 냄새가 이렇게 그리워지는 날이 오다니. 냄새의 기억은 참 강력하다.
반짝이고 화려한 시카고를 걸으며, 몸에 착 붙는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멋들어진 체크무늬의 머플러를 한 채 바삐 걸어가는 직장인들을 자주 마주했다. 그러면서 나는 잠시 내려놓고 마음 한 켠으로 치워 두었던 커리어에 대한 들끓는 욕구를 마주해야 했다.
미국에 온 후 자연스럽게 끊겨버린 나의 커리어에 대해 한동안은 매일을 불안해했다. 기존의 전공을 살려 대학원에 진학을 해야 할까, 이 참에 항상 꿈꿔왔던 작가가 되기 위한 초석을 다져야 할까. 현실적으로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새로운 직업에 대해 구상해야 할까. 끊임없이 고민하며 초조해했다. 하지만 이 작은 미국의 소도시에 적응하면 할수록 나는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현실에 안주해 갔다. 이곳에서도 드디어 하나, 둘 새로운 친구가 생기자 나는 ‘매일 노는 게 제일 좋은’ 뽀로로가 됐다. 이곳에 적응하는 게 지금은 제일 중요하고 영어를 연마하는 게 더 중요한 목표라는 생각으로 자기 위안을 하면서 말이다. 매일 발전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은 조금씩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나태한 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다 도시인 시카고에 가니, 갑작스럽게 나는 각성 상태가 됐다. 내가 꿈꾸던 30대는 저 사람들이 속해 있는 반짝이는 도시 속의 소속되는 것이었다. 스스로 반짝인다고 느낄 수 있는 삶은 사는 것이었다. 더 치열하게, 더 높은 목표를 위해서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20대 내내 나는 상대적으로 기회가 적은 포천을 떠나 그렇게도 서울로, 대한민국의 중심부로 들어가고 싶었다. 서울을 사랑했고, 서울 사람이 되고 싶었고 평생 서울에 살고 싶었다. 성공하려면 시골이 아니라 무조건 도시에 살아야 한다는 가치관이 정립됐었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나의 길이 틀어지게 된 건진 알 수 없다. 나의 가치관이 왜, 언제부터 달라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의 커리어가 1년 반 동안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덜 불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행복하다는 것이다. 나의 고향과 비슷한 조그마한 소도시에 정착해 살다 보니 나는 서울에서 살 때 보다 조금은 더 긍정적 이어진 것 같다.
서울의 삶은 늘 불안했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무언가를 계속 공부해야 했다. 미래의 불확실함 속에서 언제든 이직을 할 수 있도록 준비가 돼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 20대에 하던 진로 고민을 3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한다. 오히려 더 치열하게 말이다. 서울에서의 삶은 겉으로 보기엔 반짝이는 듯 보였다. 내면은 늘 불안과 혼돈으로 가득하면서 말이다. 자를 재듯, 정해진 나이에 사회가 정해 놓은 수순을 밟으며 나아가야만 정상궤도 안에 놓여 있다고 느끼게 끔 만드는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 사회의 룰이 항상 나를 숨 막히게 했다. 학사 학위를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취득한, 비정상적인 궤도 속에 놓인 나에게 기회는 많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선 생각보다 ‘나이’가 참 중요한 사회니까 말이다.
하지만 미국에 온 후 내가 배운 게 있다면 지금 나의 나이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충분히 어리다는 것이다. 그동안 감히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직업도 조금의 투자만 있다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 사회의 문화는 나에게 희망을 준다. 지금 잠시 멈추었다 가도 괜찮다고 말이다. 할머니가 내게 해주셨던 말이 떠오른다. “뭘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 지금도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