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어느덧 곱게 물들었던 단풍이 떨어져 길가에는 온통 낙엽 투성이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곳곳에서 낙엽청소기를 매고 흩어져 있는 낙엽을 한 곳으로 모으며 마당을 청소하고 있는 이웃들을 볼 수 있다. 펌킨 스파이스 라테와 각종 펌킨 향이 첨가된 제품이 가득하던 마트는 핼러윈이 지나고 나니 이제 글루바인과 시나몬 향이 나는 제품들로 대체되며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코스트코에 진열된 백만 원에 달하는 커다란 호두까기 병정 인형이 진열돼 있는 것을 보자면, ‘이 돈을 주고 과연 누가 사가기는 할까?’라는 생각이 들며 ‘참 크고 비싼 예쁜 쓰레기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각종 홀리데이에 맞춰 비싼 돈을 써가며 집을 꾸미는데 진심인 미국인들을 보자면 한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 기념하고 싶은 특정한 날을 위해 그전부터 날마다 최선을 다해 즐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작년 이맘때, 친구가 집의 장식을 바꾸는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방문한 적이 있다. 집에 도착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Christmas decoration’라고 적힌 커다란 리빙박스가 5개는 넘게 나와있었기 때문이다. 각각의 박스에는 산타와 루돌프 사슴코가 그려진 쿠션에서부터 트리 장식에 쓰이는 각종 전구와 오너먼트, 붉은 리본과 솔방울로 장식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쓰인 리스, 캔들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거실에서부터 장식을 바꾸기 시작했는데 새로운 장식을 놓기 위해 이전에 장식돼 있던 가을 분위기의 각종 호박 모양의 쿠션과 장식품들을 다시 리빙박스에 넣어야만 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내 키보다도 더 큰 산타할아버지 장식품을 마지막으로 거실의 장식이 끝났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집 밖의 현관에 있는 가을 분위기의 ‘welcome home’ 장식도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것으로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또 현관 앞에 발코니의 난관 역시 반짝이는 트리 모루와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포인세티아 꽃 장식을 주렁주렁 걸어야 했다. 다 꾸미고 나니 친구의 집은 이미 크리스마스가 된 듯 크리스마스 특유의 따뜻하고 행복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도와주러 갔다가 졸지에 노동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미국에서는 때가 되면 이렇게 집안의 분위기를 바꾸는구나 배울 수 있던 시간이라 뿌듯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이 시기,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때 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었다.
가을이 가고 초겨울이 올락 말락 하는 이때쯤이면 할머니와 엄마는 김장 준비에 한창이었던 것 같다. 일 년간 먹을 김치를 만드는 날이었기에 할머니는 누구보다 비장했다. 배추를 어디서 사 올 것이며 고춧가루와 굴, 새우젓 같은 재료는 어디서 살 것인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셨다. 엄마와 여러 곳을 방문하며 직접 물건을 확인하고 나서 사 오시곤 했다. 잘못했다간 일 년간 식구들 밥상에 올라갈 김치가 금방 쉬어 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매년 김장할 때 150~200포기 정도를 준비하셨다. 삼 남매의 식구들과 작은댁 식구들, 이모할머니네 식구들까지 다 챙기려면 최대한 많이 김장을 해야 했다. 김장을 하는 날에는 삼촌과 숙모, 엄마와 아빠, 이모, 작은댁 숙모들, 할머니 친구분들까지 모두 할머니네 뒷마당에 모여 거대한 방수포를 깔고 김장을 준비했다.
다들 마미손 장갑을 끼고 앞치마를 두른 후 거대한 광주리에 놓여있는 절여진 배추와의 사투를 준비했다. 광주리에 놓여있는 수많은 배추들과 그 안을 채울, 거대한 대야에 담겨있는 시뻘건 김치 속들이 장관을 이뤘다. 어른들은 분주하게 배추 안에 꼼꼼히 속을 채워 넣었다. 할머니는 작업반장이 돼 배추 안쪽 끝까지 속을 꼼꼼히 밀어 넣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나와 동생들은 그런 어른들 사이를 지나며 김장을 구경하며 김치보쌈을 한 입씩 얻어먹었다. 엄마는 즉석에서 절여진 배춧잎 한 장을 쭉 찢어 김치 속을 넣고 돌돌 말아 입에 넣어주곤 했는데 무의 알싸한 맛과 배추의 짠맛이 어우러져 개운한 맛을 냈다. 이날은 배추김치뿐만 아니라 알타리 김치, 섞박지 등 무김치도 함께 준비됐다.
할머니네 집에는 땅 속에 묻혀있는 장독대가 있었다. 그 시절 최고의 김치 냉장고였다고나 할까. 장독대에 김치를 넣어 땅 속에서 익히고 나면 김치의 아삭함과 상큼함은 배가 됐다. 김치냉장고가 보급된 이후엔 할머니도 소량의 김치만 장독대에 넣으셨지만,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단연코 말할 수 있다. 그 장독대 속에서 익은 김치의 맛은 정말 최고였다고 말이다. 미화된 기억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나는 성능 좋은 김치 냉장고에서 보관된 그 어떤 김치보다도 할머니의 장독대 속 김치의 맛이 훨씬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김장하는 날에는 빠지지 않고 그날 밥상에 나오는 음식이 있는데 바로 수육과 배추 된장국이었다. 할머니가 만들어주는 수육은 촉촉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그 향이 참 좋았는데, 엄마 말에 따르면 계피, 대추, 엄나무순, 사과, 양파, 대파, 마늘, 생강을 넣고 만든 것이라고 했다. 요즘에 수육 만드는 레시피에는 정향과 팔각 같은 향신료가 필수로 들어가던데, 할머니의 레시피는 요즘 것들과는 달랐던 것 같다. 김장을 하는 날에는 초겨울 날씨로 쌀쌀했기 때문에 김장을 마치고 먹는 뜨끈한 배추 된장국이 얼었던 몸을 녹여주는 듯했다. 김장을 하는 날은 어른들에겐 엄청난 노동의 날로 힘든 하루였겠지만 우리들에겐 그저 맛있는 것이 가득한, 하루 종일 어른들의 관심을 피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날이었다. 김장을 끝낸 어른들은 다 같이 근처 동네 목욕탕으로 가서 몸을 풀고 오시곤 했다. 덕분에 우리는 해가 진 저녁까지 우리들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할머니가 아프시기 전 마지막 김장날이 생각난다. 사실 이날 내가 갔었는지 못 갔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서울에서 바삐 생활하던 중에도 나는 최대한 김장하는 날엔 포천에 가고 싶었다. 신선한 김치 보쌈과 수육, 배추 된장국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의 정겨운 풍경도 말이다. 그때의 김장에 대해 생각나는 건 이모가 했던 말이다. “올해, 엄마 김치 맛이 좀 달라진 것 같아”라는 말이었다. 그 후 1년 뒤, 할머니는 김장의 계절인 11월,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이모는 말했다. “작년에 엄마 김치 맛이 달라졌을 때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을 걸 알아챘어야 했어”라고 말이다. 이제는 우리 가족의 연례행사 같았던 김장의 날도 추억 속에 남게 됐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다 같이 모여 김장하는 풍경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엄마와 아빠는 집에서 20포기 정도, 간소하게 김장을 하신다. 올해도 어김없이 아빠와 단 둘이 팔을 걷어붙이고 했다는 김장 사진은 꽤 짠한 여운을 남긴다. 항상 친정에서 다 함께 김장하며 어깨너머로 김치 담그는 법을 익혔던 우리 엄마는 이제 김치 담그기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다. 기억 속 할머니의 김치 맛을 기억해내려 애쓰며 할머니가 사용했던 방법들을 떠올리며 엄마만의 레시피를 만들었을 것이다. 미국에 와서 매번 비싼 김치를 사 먹으며 새삼 김치의 소중함을 느끼는 중이다. 김장의 계절이 돌아오니 할머니가 해줬던 김치, 엄마가 해준 김치가 너무 먹고 싶다. 우리 가족의 손맛이 담긴 우리 입맛에 딱 맞는 그 김치 말이다. 틈이 나는 대로 어서 나도 엄마의 손맛을 익혀야겠다. 할머니로부터, 엄마에게 이어진 이 손맛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