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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 소나무 Sep 28. 2022

위풍당당 그녀

(16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고등학교 시절 나는 부당한 일을 당하면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따져 묻고 할 말은 해야 하는 성격이었다. 이때 나의 이러한 모습을 본 부모님은 걱정이 많으셨다. 이 성격으로 나중에 어떻게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겠냐고 말이다. 그런데 이 당찬 성격은 20대를 지나며 점점 누그러져 갔다. 직장인이 되고 보니 나는 해야 할 말도 바보처럼 하지 못하고 그저 마음속에 분노와 부당함을 꾹꾹 눌러 담는 사람이 돼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관계에 있어 ‘평화’를 지극히 중요시하는 ‘평화주의자’가 돼있었다. 갈등 상황이 생기는 것을 회피했고, 갈등 상황이 생긴다면 내가 참고 넘어가는 방식으로 상황을 크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의 요구를 똑 부러지게 관철시키는 능력은 언젠가부터 사라지게 됐고 그렇게 혼자 속앓이를 하는 날들은 많아졌다. 그래서 나는 회사를 다닐 때 스스로 화를 삭이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입사 1년 차가 지나고 나선, 퇴근 후 술 마시는 날이 잦아졌다. 퇴근 후 마시는 맥주 한잔은 그 안에 든 탄산과 함께 내 속에 쌓인 체증을 내려 보냈다. 그렇게 삼키고 삼켜야 비로소 비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퇴근 후 맥주 한 잔~ 출처: pixabay

사실 어떨 때는 이렇게 바뀐 내 성격이 좋았다. 고등학교 시절 내 모습을 생각하면 언제나 예민했고 날이 서있었으며 참는 법을 알지 못했다. 20대 시절, 여러 실패를 경험하며 세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그러고 나니 더 이상 따져 물을 이유가 생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내가 조금 인내하고 지나가면 어떨 땐 상황이 더 편하게 흐른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으니 말이다. 그래도 가끔 내가 정말 참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바로 예의 없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이다. 


ESL(English as a second or foreign language) 수업을 들으러 가면 다양한 국적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과 만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절하고 호의적이지만 간혹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무례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이곳은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인종, 종교, 문화에 대한 존중은 필수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생긴다면 그건 무지에서 나온 무례함 때문이다. 

이해와 존중이 필요한 곳. 출처: pixabay

일례로 지난 학기에 콜롬비아에서 온 친구가 중국에서 온 친구에게 ‘너네 나라에서는 왜 이렇게 짝퉁 물건을 많이 만드는 것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콜롬비아 친구 입장에서 이 질문은 악의 없이, 순전히 궁금해서 물은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인 친구 입장에선 자신의 나라를 모욕하는 질문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두 친구 사이에선 한동안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최근 나에게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다. 얼마 전 이런 질문을 들은 것이다. “너네 나라에서는 밥 먹을 때 손으로 먹어?”라고 말이다. 물론 아시아 문화에 대해 알지 못해 궁금하다면 이러한 질문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일전에 미스커뮤니케이션(Miscommunication)에서 비롯된 두 친구 간의 오해를 목격했기에 나에게 이런 상황이 오면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당황했고 화가 났다. 내가 생각했던 범주 안에 있는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방의 태도 때문에도 화가 났다. 보통 다른 친구들은 아시아 문화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로 질문을 할 때엔 최대한 조심스럽게, 적절한 어휘를 선택해 물어본다.


하지만 그 친구는 너무 직접적인 어휘를 선택함으로써, 무지함 내세워 무례한 태도로 물었다. 물론 내가 예민했던 걸 수도 있다. BTS와 오징어 게임 등의 성공으로 이제 미국에서도 한국의 위상이 어느 정도 높아졌다고 생각하며 국뽕에 조금 취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 와서 지금까지 만난 다른 친구들은 주로 한국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K-POP과 K-드라마에 관한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진 걸 체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제 외국인들에게도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어느 정도는 자리 잡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세상은 넓고 세상엔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에게 화가 났던 부분은 내가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데 이를 똑 부러지게 지적하고 말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 사소하고 작은 에피소드이지만 이럴 때조차 내 의견을 피력하거나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집에 돌아와 이불 킥을 하며 ‘무례한 사람 대처법’, ‘외국에서 무례한 사람 만났을 때’와 같은 키워드를 폭풍 검색하며 다음번에 또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면 그때는 꼭 제대로 받아쳐줘야지 다짐했다. 물론 예의 바른 태도를 갖춰서 말이다. 지금 나의 이런 모습을 봤다면 할머니는 분명 “어쩌다가 이렇게 물러 터진 감이 됐을까”라고 말하셨을 것 같다. 




할머니는 할 말은 할 줄 아는 사람이셨다. 부당한 일을 당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돌직구를 날리는 타입이라고나 할까. 할머니는 돌직구뿐만 아니라 돌려 까기의 달인이 시기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은 꼭 내뱉어야 직성이 풀리셨다. 


할머니와 엄마, 나는 종종 포천에 있는 온천에 가곤 했다. 온천에 가는 건 할머니와 엄마의 낙이었다. 어릴 때부터 공중목욕탕을 다녔던 터라 공중목욕탕에 대한 거부감이 생길 틈이 없었다. 당연한 일상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크면서 내 몸에 더러운 것을 묻히는걸 지독히 싫어하는 결벽증이 생겼지만 이상하게도 공중목욕탕에 갈 때면 이 결벽증이 조금은 누그러지곤 했다. 물론 목욕탕에 갈 때 우린 주로 새벽 일찍, 사람이 없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탕을 차지할 수 있을 때 주로 방문했다. 

새벽 일찍 온천 가기. 출처: pixabay

목욕탕의 공용 의자와 세숫대야도 비누로 꼼꼼히 몇 번이나 닦고 뜨거운 물을 틀어 할 수 있을 때만큼 소독하곤 했다. 우리 자리를 세팅하고 나서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나는 따뜻한 탕에 가거나 사우나에 가서 땀을 빼곤 했는데 그러다가 가끔 우리 자리로 돌아오고 나면 누군가 우리 의자를 쏙 훔쳐가 앉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우리 의자를 가져간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이 “아니 누가 기껏 깨끗하게 닦아놓은 의자를 냉큼 훔쳐가고 그러나. 누군지 몰라도 정말 양심 없네”하며 말하곤 했다. 할머니가 그렇게 말할 때 반응을 보이며 머쓱하게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이 있으면 십중팔구는 그 사람이 범인이었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나, 붕어빵을 사려고 줄을 서 있을 때에도 누군가 새치기를 하려고 치면 할머니는 눈감아 주지 않았다. 큰 소리로 면박을 주거나 우리가 먼저 왔는데 왜 새치기를 하느냐고 따지기도 하셨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시는 편이셨다. 한 번은 중학교 학생들이 할머니네 집의 벨을 누르고 도망가는 일명 ‘벨튀’를 했던 일이 있다. 벨튀는 며칠에 한 번씩, 몇 주간이나 지속됐다. 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장난치는 학생들을 잡으러 집 밖으로 나가 큰 소리로 화를 내보기도 하고 쫓아가 보기도 했지만 할머니의 걸음걸이로는 한창 팔팔한 젊은 학생들을 따라잡을 순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건장한 작은집 삼촌을 데려와 그 학생들을 잡기로 한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벨튀를 하러 온 학생들은 문 뒤에 숨어있던 삼촌들에게 그대로 붙잡혔고 줄줄이 끌려 할머니네 집에 들어오게 됐다. 할머니는 학생들을 따끔하게 혼냈을 뿐 아니라 사과도 받아냈다. 할머니의 승리였다. 그 후로 할머니네 집에서 벨튀 사건이 발생하는 일은 다신 없었다. 

할머니라고 만만하게 보지 마세요. 출처: pixabay

할머니의 이런 당찬 모습을 나도 닮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삼키는 말들이 많아지고 나의 의견을 피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자니 자꾸만 작아진다. 할머니는 어떻게 그 오랜 세월 위풍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할머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10대 시절의 내 모습이 내 안 어딘가에 아직 남아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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