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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 소나무 Sep 15. 2022

배움에 늦음은 없다

(15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미국에서 나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보자면 미국으로 공부하러 온 학생의 가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미국에서 일을 할 수 없고 심지어는 풀타임으로 수업도 들을 수 없다. 이에 사람들은 유학생 가족 비자(F2 비자)를 두고 일명 ‘시체 비자’라고까지 부른다. 우리나라의 주민번호 같은 SSN(Social Security Number)가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사는 동안 나에겐 여러 제약이 존재한다.


한 일례로, 미국에 와서 처음 은행에 갔을 때 “Are you nothing?”라는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은행 계좌를 만들어야 하는데 나는 이곳에서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니니 그들 입장에선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nothing’이 주는 어감 때문인지 당시엔 이 말에 상당히 상처받고 서러웠다. 마치 1+1 상품처럼 남편에게 +1으로 얹혀진, 가치 없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이런 상황을 모르고 미국에 온 건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상황에 마주할 때면 울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사회에서 내가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한 순간에 쭈글이가 되어버린 나. 출처: pixabay


그래도 나에게 주어진 5년이란 시간을 풀이 죽어서 우울하게 보내고 싶진 않았다. 쉬어 가는 이 시간을 치열하게 살았던 20대 시절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조금 긴 안식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기 계발을 위한 시간으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사 온 직후 곧장 ESL(English as a second or foreign language) 수업을 찾아보게 됐다.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영어 실력을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집 근처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정부에서 지원하고 있는 ESL 수업이 있었다. 무려 무료로 말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거의 2/3는 영어공부를 하며 보냈던 것 같은데 미국에 와서 마주한 실제 영어는 나의 멘탈을 메마른 나뭇잎처럼 ‘바스락’ 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특히 남부지역 특유의 악센트는 평소 영어 듣기 평가에 나오는 깔끔한 영어 발음에만 익숙했던 내겐 큰 충격이었다. 현지인의 영어를 듣고 알아듣지도 못하고 전혀 반응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꼈고 그걸 넘어 화까지 치밀었다. 한국에서 토익, 토플, 텝스까지 영어공부라면 지겹도록 해왔는데 막상 미국에 오니 한순간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영어회화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던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한 순간에 사람이 무지해질 수 있을 줄 몰랐다. 나이 30이 넘어 영어공부를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다니, 그동안 내가 해왔던 영어 공부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이번엔 어떻게든 극복해야 했다.

왜 말을 못 하니, 말을! 출처: pixabay


다행히도 현지인과의 만남에 대한 부담감이나 영어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은 ESL 수업을 들으며 차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영어를 쓰는 환경에 비로소 익숙해졌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한 말인 것 같다. ESL 수업에 온 대부분의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문법, 리딩 같은 영역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스피킹 영역이었다. 이곳에 살면서 가장 필요하지만 나에겐 가장 부족한 영역. 아무리 많은 단어와 문법을 알아도 말을 하지 못해 의사소통을 못하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그동안 내가 해왔던 영어공부는 진짜 영어가 아니었구나 싶었다. 물론 소심한 나의 성격 탓에 영어를 자신 있게 뱉지 못하는 것도 스피킹 실력을 향상하는데 큰 걸림돌이었다. 처음엔 매번 머릿속에 문장이 완성되지 않으면 뱉지 않았다. 한국말을 머릿속에서 먼저 생각하고, 그걸 번역해 뱉어야 했으니 영어를 소리 내어 말하기까지 그 프로세스는 참 더뎠다. 그래서 학기 초, 학급 친구들은 나에게 말하는 속도가 느리다고 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항상 내게 말이 빠르다고 했는데, 영어를 쓰니 순식간에 말을 천천히 하는 사람이 돼버렸다.  


끝이 없는 배움의 늪. 출처: pixabay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언어를 다시 처음부터 배운다는 느낌은 얼마나 좌절스러운가. 나는 일 년간 영어공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 가짐으로 배움에 임했다. 그러면서 문득 할머니에게 한글 쓰는 법을 가르쳐줬던 학창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 할머니의 마음도 이러한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을까.




우리 할머니는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6.25 전쟁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것에 대해 두고두고 미련이 남아 계셨다. 그러면서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격지심을 가지고 계셨다. 물론 간단한 문장을 읽거나 이름 같은 기본적인 글자는 쓰실 수 있었지만 일상에서 할머니는 자주 까막눈이셨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어느 날, 할머니는 한글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으셨다. 무엇을 계기로 이런 마음을 먹으셨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할머니는 어느 날 깍두기공책을 한 권 사 오셨다. 그러곤 내게 ‘기억, 니은, 디귿’을 써 달라고 하셨다. 처음에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내가 써준 ‘가나다라’를 보고 연필로 정성스럽게 따라 쓰며 집중하는 할머니를 보니 그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할머니의 한글 선생님이 됐다. 그때 나는 고작 11살, 12살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할머니는 그렇게나 어렸던 내게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게 민망하셨을 법도 한데 오히려 할머니는 정중했고 당당하셨다.


또, 할머니는 유치원생이 한글을 배울 때 보는 한글 학습용 비디오도 애청하시며 열심히 셨는데, 그 비디오는 12살인 내가 볼 때에도 굉장히 유치해서 끝까지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한글 배우기에 대한 할머니의 열정은 대단했다. 그 비디오를 몇 번이고 다시 돌려보며 공부하셨다. 실력이 점점 늘자 할머니는 내게 받아쓰기 시험도 내달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손자, 손녀 앞에서는 한글 배우는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셨다. 하지만 사위들에겐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시는  같았다. 한글 비디오를 시청하고 계시다 가도 우리 아빠나 이모부가 할머니네 오면 얼른 비디오를 끄고 숨기셨다. 그리곤 검지 손가락을 앞에 가져다 대며 ‘하는 입모양으로 내게 신호를 보내곤 하셨다. 아마도 체면을 중시했던 할머니가 사위들에게만큼은 자신의 치부를 보여주고 싶지 않으셨던  같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오던 이맘때와 비슷한 시기였다. 할머니가 한글 공부를 시작했던 건. 울긋불긋 단풍이 예쁘게 물들어 가기 시작하며 할머니의 한글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 해 단풍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겨울이 시작할 무렵 할머니는 원하는 문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고 한글을 큰 소리로 당당히 읽을 수 있게 되셨다. 물론 맞춤법까지도 완벽하게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나는 건 할머니가 자신의 이름 '김춘자'를 쓸 때 한글을 배우기 전과 그 후, 글씨체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전에는 이름을 외우듯 암기하고 계셨기 때문에 삐뚤빼뚤 큼지막 한 글씨체였다. 하지만 한글을 마스터하시고 난 후 할머니는 자신 있는 글씨체로 연필을 꾹꾹 눌러 한 글자 한 글자 할머니의 얼굴만큼 반듯하고 근사하게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할머니를 꼭 닮았던 할머니의 글씨체. 출처: pixabay


이때 할머니의 모습은 뜨거웠다. 내가 배우고자 목표한 바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 내가 보아왔던 할머니의 모습 중 가장 멋있었던 모습이었다. 목표를 위해 부끄러움 없이 도움을 요청했던 모습, 이해가 될 때까지 묻고 열렬히 고민했던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 나는 깨달았던 것 같다. 할머니가 얼마나 배움에 대해 목말라 있었는지. 나이에 상관없이 무언가를 배우려고 도전하는 그 마음가짐이 얼마나 우아한지 말이다. 평생 모국어로 한글을 사용했지만 그동안 글을 자유롭게 읽고 쓰지 못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언어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지금 나의 심정과 비슷했을까. 아마 그 이상이셨겠지. 할머니가 해내셨던 것처럼 나도 결국엔 원어민처럼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될까. 할머니의 의지를 내가 닮았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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