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이곳에 지내는 동안 한국의 명절이 다가오면 가족들 생각이 더 간절하다. 벌써 이곳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설이다. 한국의 설날이 이곳에서는 그저 특별할 것 없는 하루이기에 작정해서 마음먹고 기념하지 않으면 설날의 분위기를 느끼기 쉽지 않다. 지난해 설엔 중국인 친구의 초대를 받고 함께 전통음식을 나눠 먹으며 설을 보냈다. 중국 역시 한국처럼 음력 1월 1일 새해를 기념하는 춘절이 있기 때문이다. 친구가 준비한 음식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중국식 만두인 ‘쟈오쯔(饺子)’였다.
외관상 우리가 설날에 먹는 만두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이날 친구는 쟈오쯔 안에 들어갈 만두소를 한가득 만들어 놓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모인 친구들은 만두피를 집어 들고 만두를 빚어야 했다. 미국에 사는 중국인 집에서 설날에 가족들과 함께했던 만두 빚기를 하고 있자니, 묘하게 익숙한 듯 낯설었다.
나는 내가 만든 만두를 구별하기 위해 집에서 빚던 방식 그대로 만두에 소를 채우고 잘 여민 후 양 끝을 붙여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러자 만두 빚는 날이면 할머니와 엄마가 어김없이 했던 말이 내 귓가를 스치는 듯했다. “만두를 예쁘게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는 속설말이다.
우리 가족은 설날이면 항상 만두를 빚었다. 할머니는 명절 일주일 전부터 음식 만들기에 돌입했고 만두 속을 한가득 만들어 놓으셨다. 할머니는 만두피 역시 직접 손으로 반죽해 만드셨다. 덩어리 진 반죽을 한 덩어리 떼어내 길게 늘어뜨린 다음 적당한 크기로 떼어내 나무 밀대로 밀어 동그란 형태를 만들어 주면 만두피가 됐다. 직접 만든 만두피는 마트에서 사는 만두피보다 더 쫄깃했고 만두를 빚으면 잘 터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만두피를 만들어 던져 놓으면 우리는 커다란 상에 둘러앉아 밀가루 묻힌 손으로 만두를 만들기 시작했다. 만두를 빚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몇 시간이 금방 흘렀고 쟁반에 만두가 쌓여갔다. 손맛이 들어간 만큼 할머니표 만두는 일품이었다. 그 맛이 얼마나 대단했냐 하면, 오랜만에 할머니댁에 방문했던 외삼촌할아버지의 아들은 할머니의 만두가 먹고 싶어 그다음 해 설날에도 일부로 시간을 쪼개 할머니댁에 다시 들렸을 정도였다.
나는 이러한 전통이 좋았다. 가족들이 북적거리며 음식을 만들고 웃고 떠들다 보면 명절 느낌이 제대로 났다. 설날 저녁이 되면 우리 가족은 모두 모여 윷놀이를 즐겨하곤 했다. 기름진 명절 음식에 질릴 무렵, 치킨이나 피자를 쏘는 내기를 걸고서 각자 식구끼리 편을 먹고 윷놀이를 시작했다. 때론 이기고 있던 팀이 따라오던 말에 잡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어떤 때엔 1등을 하던 팀의 마지막 남은 말이 결승점에 도착해야 하는 정확한 패가 나오지 않아 그 자리에 계속 머물다가 꼴찌가 되기도 한다. 물론 가끔은 삼촌과 이모 사이에서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누군가는 눈속임으로 말판의 말을 한 칸 더 움직이려 했고 이를 알아챈 누군가가 따져 묻기 시작하면 분위기는 한층 더 화끈해졌다. 이 분위기는 가끔 걷잡을 수 없는 화염처럼 커지기도 했지만 설날에 윷놀이는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명절마다 했던 이 모든 것들은 우리 가족의 ‘패밀리 트레디션(Family Tradition)’이었다. 미국에 살다 보니 가족 간의 이러한 전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설날과 같은 명절이 특별했던 건 명절 자체가 아니라 그날 가족들과 함께 했던 시간 덕분이었다.
올해 설날은 새해에 방문했던 친척 오빠네서 만들어온 만두를 먹으며 보낼 것 같다. 어릴 때 만두를 빚을 때면 뺀질거리며 도망갔던 오빠는 이젠 두 아이의 아빠이자 만두 빚기의 달인이 됐다. MZ세대에서 보기 드문 참한 새언니 덕분에 오빠네 집에서 우리는 어릴 적 설날에 그랬듯이, 식탁에 둘러앉아 만두를 빚어갔다. 어릴 때 사고뭉치였던 오빠의 무용담을 들으며 말이다. 홀리데이의 가족 간의 전통을 만드는 건 이렇게 중요하다. 어른이 된 이후 오래 못 보고 떨어져 있어 소원해졌다고 할지라도 서로의 공유할 수 있는 접점을 만들어 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