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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 소나무 Feb 23. 2023

에필로그

(마지막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Epilogue 


뇌는 얼마나 오랫동안, 뚜렷하게 오래된 기억들을 간직할 수 있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아직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할머니의 목소리, 얼굴들이 점점 희미해진다. 다행히 가끔씩 나의 꿈속에 나타나주신 덕분에 할머니의 모습을 까먹지 않고 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 감정들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어딘가에 기록하고 싶었다. 또, 누구보다도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엄마를 위해 이 글을 쓰고 싶었다. 할머니와 엄마가 내게 물려준 유산이 어떤 것들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결혼과 동시에 미국에 오게 되면서 내 인생은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덕분에 과거의 나를 돌아볼 시간이 많아졌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무엇이며, 나를 만든 토양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한 번도 나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한국 땅을 벗어나 익숙한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나니 지금의 내 가치관과 성격, 성향, 인성이 어떻게 형성된 건지 궁금했다. 


ESL 수업에서 한 학생이 선생님에게 영어를 쓸 때 악센트를 고치는 게 너무 어렵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때 선생님은 악센트를 고쳐주기 노력하기보다는 이런 말을 했다. "너의 악센트를 자랑스럽게 여겨라"라고 말이다. 네가 가지고 있는 악센트는 네가 어디에서 온 지 알려준다고. 즉, 너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니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말이다. 참 멋진 말이었다. 영어를 쓸 땐 버터 잔뜩 바른 원어민 같은 발음을 구사해야 한다는 강박을 날려주는 시원한 말이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듯이, 모든 것이 흠잡을 데 없이 고결한 배경 위에 만들어진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없다. 긍정적인 경험도, 부정적인 경험도 결국 현재의 정체성을 이루는데 일조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도 기록하고 싶었다. 나의 정체성의 가장 중심이 되는 커다란 뿌리는 어디서 오는지 말이다. 할머니와 엄마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엄마가 이 글을 보며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느끼고 있을 상실감이 어느 정도는 메워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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