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쁜 소나무 Feb 23. 2023

기억 속의 존재

(23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나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타입이다. ‘내 물건’에 약간의 집착이 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인지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도 않는다. 특히 내 손때가 오랫동안 묻은 물건엔 애착이 강하다. 그래서 내 방에는 아직도 6~7살 때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부터 학창 시절 친구들이 써줬던 편지, 우정 반지들이 상자 속에 보관돼 있다.


나의 이러한 특성이 물건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장소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행복한 기억이 담겨있거나 추억이 담긴 장소를 반복적으로 방문하는 걸 즐긴다. 관성이라고 해야 할까. 가령, 신촌에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우리는 대학생 시절 자주 갔던 단골집을 순회한다. 만약 을지로에서 약속이 생기면, 이 근처에 올 때마다 방문하는 와인바로 향한다.


미국에 오기 전 엄마아빠와 마지막으로 들렸던 동해 바다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바다였고 매년 꽃이 피면, 엄마와 나는 할머니와 함께 갔던 그 장소에 가서 과거, 행복했던 그때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습성은 때때로 나를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만들어 버리곤 한다. 보통은 그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거나 다신 볼 수 없게 됐을 때 발생한다. 이제 다신 이곳에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혹은 다신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만든다. 이제는 나의 기억 속에서만 그 장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우리의 첫 번째 신혼집에서 이사를 나와야만 했다. 미국에 와서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서웠던 우리 부부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달랑 캐리어 몇 개만 들고 들어가 빈 곳을 하나씩 채워가던 우리의 첫 번째 집이었다. 달콤한 신혼생활을 그곳에서 보냈고, 운이 좋게도 이웃사촌으로 우리와 결이 잘 맞는 한국인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이곳에서 보낸 18개월은 꿈같은 시간이었다. 계약이 끝나고 이제 이 집을 떠나야 하는 시점인데,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상이 특별해지는 순간을 경험했던 곳이었다. 잦은 야근에, 퇴근 후에도 마음 편히 쉬지 못했던 한국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이곳에 왔을 때 나는 사소한 일상이 모두 행복했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에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행복했고, 창문을 통해 바람이 살랑이며 들어올 때 눈을 감고 잠시 낮잠을 청하면,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느껴졌다.  

우리의 첫 번째 집. 출처: SOL

하지만 이제 이곳을 떠나면 이 집은 나와 남편의 기억 속에서만 실재하는 곳이 될 것이다. 이곳에서 보냈던 그 따뜻하고 설레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점차 희미해질 것이다. 사실, ‘내 집 마련’이 곧 이뤄지지 않는 한, 우리에겐 앞으로 거쳐갈 수많은 집들이 기다리고 있다. 단지 이 집이 그렇게 발걸음을 떼기 어려웠던 이유는 결혼 이후 신혼 생활을 보낸 첫 번째 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본디 ‘처음’이란 수식어엔 애착이 더 가기 마련이니 말이다.




처음이란 수식어와 비슷하게 ‘마지막’이란 수식어에도 애착은 간다. 어쩌면 더 강렬한 감정이 요동치는 걸 느낄 수 있다. 우리 엄마가 어릴 적 자랐던, 나의 어린 시절 행복했던 기억이 가득했던 할머니네 집이 철거될 때 그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삼촌과 이모, 엄마는 할머니네 집을 매매하기로 결정했다. 엄마에겐 마음 아픈 결정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곳. 출처: SOL

철거가 되기 전 마지막으로 찾은 할머니네 집은 황량했다. 할머니의 온기가 사라진 집은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할머니네 집에 들어가면 나던 익숙한 냄새도 사라졌고, 안락함을 주던 실내의 나무벽들은 어쩐지 너무 낡아 곧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내 기억 속 그날의 할머니네 집은 모든 색과 생기를 잃어버려 회색 빛의 쓸쓸함만이 가득한 곳이었다.


할머니네 집이 철거된 이후에도 그곳을 지날 일이 자주 있었지만 그곳을 굳이 쳐다보진 않았다. 눈길을 피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내 기억 속의 존재해야 할 그곳이 사라졌음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내 기억 속 그대로 그 집이 존재하길 바랐다.




언제까지나 그대로일 것 같은 것들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나니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처음 가보는 여행지에 가더라도 ‘언젠가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새로운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곧 지나갈 이 찰나의 순간이 애달프고 아깝게 느껴진다.


미국에 살게 되면서 이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미국 곳곳을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이제는 여행을 가게 되면 나는 언젠가 이곳을 다시 방문하게 될 미래를 꿈꾸는 대신, 하나라도 놓칠까 모든 걸 내 눈에 담기 바쁘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새로운 곳에 여행을 가면 이제는 어디서 올라오는지 모를 조바심이 느껴진다. 이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일까 봐 겁이 나서.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장소에 실제로 다시 방문할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시간도 돈도 타이밍도 삼박자가 고루 맞춰져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20살 때 방문했던 파리에서 나는 에펠탑에 오르지 않았다. 다음번에 다시 이곳에 방문하게 되면 할 것들을 남겨 놓고 싶어서였다. 그때 여행에서 만났던 한 사람이 했던 말도 영향을 미쳤다. '이번에 찾은 에펠탑이 왜 너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냐'라고 '아직 어리고, 나중에 다시 올 수 있다'라고 했던 말 때문이었다. 이 말에 용기를 얻어 다음번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르리라 꿈을 꾸었다. 하지만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아직까지 다시 그곳을 방문할 기회는 없었다. 20살 때, 꿈에 그리던 유럽여행을 하며 나는 10년 뒤 다시 이 장소들을 그대로 재방문해 20대의 나와 30대의 나를 비교해보고 싶었다. 10년이란 세월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경험하며 얼마나 다르게 느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다짐은 아직까진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언제 다시 보게 될까. 출처: Pixabay


예전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는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 이치를 받아들이기 점점 힘들어진다.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은 내가 이 도시를 떠나고 나면 ‘언젠가 다시 볼 순 있을까?’ 하는 생각에 벌써부터 이별이 걱정된다. 기억에만 존재하는 것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예전보다 조금 더 많이 ‘지금 이 순간’에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이전 08화 홀리데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