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가 맞벌이를 할 때 방학이 되면 나와 내 동생은 외할머니댁에 맡겨졌다.
외할머니댁은 전라남도 '진도'였다.
그 당시 서울에 살았는데 진도까지 내려가려면 고속버스를 타고 8시간 이상을 가곤 했다.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슈퍼에서 버스표를 끊고 슈퍼 앞 도로에 서는 고속버스를 타면 진도 읍내까지 직통으로 갔다.
생각해 보면 고속버스터미널까지 가지 않아도 그렇게 손쉽게 진도까지 갈 수 있는 버스를 탈 수 있는 게 신기하지만
어찌 됐건 그 버스가 있는 덕에 엄마는 그 멀리까지도 우리를 할머니댁까지 보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엄마랑 갔던 적도 있었지만 기억에 엄마는 동생과 나만 태우고 보낸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진도까지는 너무 멀었다. 더군다나 멀미가 심한 나는 버스에 오르면 바로 고개를 숙이고 잠을 청했다. 빨리 잠들지 않으면 가는 내내 어지러워서 고생을 하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잠을 자야 했다. 8시간이 넘게 걸리는 시간은 자다 깨고를 무한으로 반복해도 오래 걸리는 시간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할머니가 사는 동네를 말하면 기사 아저씨가 알아서 데려다주었다. 우리 할머니 집은 아주 외딴집이었다. 그 동네에서도 사람들이 사는 집들과 좀 동떨어진 곳에 오롯이 홀로 있는 집이었기 때문에 그 집에 간다고 하면 내가 누구네 손녀인지 단박에 아는 그런 집이었다.
한 두 달 하는 방학기간 동안 할머니집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정말 '쉼' 그 자체였다. 먹고 자고 놀고, 먹고 자고 쉬고.
멀미를 심하게 겪고 할머니댁에 도착하면 한 이틀 정도는 거의 먹고 자기만 하면서 몸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정말 아~~~~ 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규방송만 나오는 텔레비전은 할머니가 저녁에 연속극을 보는 용도였고 만화도 나오지 않는 티브이를 굳이 틀지는 않았다.
그 섬은 참 조용했다. 할머니 집 툇마루에 앉아 마당에서 어슬렁 거리는 개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으며 바라보거나
마당 끝 담벼락에 핀 꽃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것을 구경했다.
할머니 집 담벼락 밖으로는 밭이 좀 있고 밭 앞에는 차들이 지나가는 작은 도로가 있고 그리고는 바로 바다였다. 그 바다는 사람들이 전혀 찾지 않는 아주 작으면서도 조용한 바다였다. 백사장으로 깨끗한 모래가 쫙 깔려있는 바다와 다르게 조개껍데기며 조업하다가 버려진 그물이며 오래된 배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그래서 꼭 버려진 바다 같았다.
양쪽으로 자그마한 산이 있고 그 사이에 있는 파도가 일렁이는 작은 바다는 우리의 물놀이터였다. 더우면 바다에 풍덩 들어가 헤엄 좀 치다가 나와서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보고 그러다 멍하니 일렁이는 바다를 보기도 하고 또 들어가고 싶으면 풍덩 다시 빠지기도 하고. 꼭 놀이터에 그네, 시소, 미끄럼틀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놀이터에는 바다, 모래, 조개껍데기가 있었다.
하는 게 별로 없어서 그런가, 진도에 가면 모든지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곤 했다. 길거리에 들꽃도, 날아다니는 나비도, 바닷가 앞에 모래사장을 기어 다니는 벌레도. 시공간이 슬로모션에 걸린 것처럼 아주 느릿느릿 천천히 움직였고 나도 그 안에서 느림보처럼 그 시간들을 보냈다.
한 번은 너무 심심했던 나랑 동생이 모험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길을 나선 적이 있었다.
그건 바로 고개를 한 5개 정도 넘어야 나오는 마을의 작은 슈퍼에 갔다 오기로 한 것이다.
오르고 내리는 가파르지만 작은 언덕길을 넘고 넘으면 거기에 슈퍼가 있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았지만 거길 가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우리 둘이 가기엔 너무 멀었고 사실 갈만한 이유도 없었다. 딱히 살 물건도 없고 거기까지 가면 괜히 고생이지 싶었는데 진짜 너무 심심하니까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엄마랑 함께 진도에 내려올 때, 엄마는 택시를 타고 마을에 들어오면서 그 슈퍼 앞에 꼭 한 번 멈춰 들러서 우리와 할머니가 먹을 주전부리를 사고 가게 주인과 인사를 나눴다. 그래서 그곳에 슈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었다. 옆으로 새는 길도 없고 곧장 고개만 넘으면 그 끝에 있으니까 그냥 직진만 하면 됐다.
준비물은 하나, 가다가 배고프면 먹을 주전부리. 양쪽주머니에 사탕이며 캐러멜이며 몇 개씩 쑤셔 넣고 길을 나섰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가니까 생각보다 가까운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고개. 마지막 고개 양 옆으로는 집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오니까 집들이 고개 옆으로 줄지어 있었는데 여기가 진도 아니랄까 봐, 아주 집집마다 진돗개를 2~3마리씩은 키우고 있어 우리가 마지막 고개에 들어서자 온 집에 개들이 일제히 한꺼번에 짖어대는데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그렇다고 무섭게 덤벼들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그 사이를 지나가기가 겁이 났다. 아, 거의 다 왔는데... 여기만 지나면 저기 끝에 슈퍼가 있는데, 망설여졌다. 동생이랑 고민한 끝에 우리는 주머니 안에 있는 사탕과 캐러멜을 몽땅 꺼내 양 옆으로 막 던지면서 그 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 슈퍼로 골인을 했다. 숨을 고르고 다시 사탕과 캐러멜 따위를 사고 돌진 준비를 마친 후 먹을거리를 적군에 막 투하하며 그 고개를 통과하고 나니 슈퍼에서 샀던 주전부리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소득은 없었지만 그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소란한 사건이 마음을 흥미진진하게 하는 데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재미있는 일은 그 뒤에 하나 더 있었다. 날이 좀 어둑어둑 해지려고 하고 나는 동생을 골려먹기 위해 무서운 이야기를 했는데 그 내용은 이런 어둑한 골목에서 만난 사람이 갑자기 질문을 3가지 하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고 그 귀신에게 3가지 모두 대답을 하면 똑같이 귀신이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지어낸 이야기였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저 언덕 끝에서 할머니 한 분이 마침 걸어오고 계셨다. 그분은 우리를 보자 어디에서 오는 거냐고 물었고, 누구네 집 손녀냐고 물으셨다. 그러고는 엄마 이름을 물으셨는데 동생은 직전에 나의 말을 믿었는지 할머니 물음에 대답도 안 하고 '으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냅다 뛰어갔다. 나는 할머니께 대답해 드리고 큭큭큭 웃으며 동생을 따라갔다. 그걸 믿다니.... 한참을 배를 잡고 웃으며 할머니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남아 있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선명하지 않고 흐릿하다. 한 컷 한 컷, 이미지가 잔상처럼 떠올려지기도 하고 드문드문 기억이 났다 안 났다 하는 것들도 많다. 기억에 남는 것들이 특별하게 애틋하다거나 특이하지도 않다. 태풍이 불어올 때는 바닷물이 바람에 날아와 할머니 집 담벼락에 부딪혀 툇마루에 서있는 내 얼굴에 산산조각이 나 이슬비처럼 내려앉았다. 봉숭아 꽃을 따다가 손에 예쁘게 물들이며 언제 첫눈이 내리나 손꼽아 보기도 했다. 먹으려고 호빵을 쪘는데 할머니네 진돗개가 냉큼 물어가 그 개를 앞에 끌어다 놓고 한참을 뭐라고 하며 혼을 냈었다. 할머니는 식사 때만 되면 주방 가스레인지 앞에서 "이거는 먹냐?" 하고 늘 물어보셨다. 자려고 누워 있으면 창문 사이로 온갖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고 귀 기울이고 있다 보면 궤종소리가 "땡~땡~" 울어서 깜짝 놀랐었다. 겨울이면 할머니랑 화투를 치며 귤을 하도 까먹어 서울에 올라와서도 한동안은 노래진 손가락 끝이 지워지지도 않았다. 한 여름밤, 컴컴한 바닷가에서 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무수하게 빛나고 있어서 콩콩 뛰어 진짜 잡아보려고 했었다. 이런 기억들.... 평소에는 머릿속에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헤집어보니까 하나하나 차곡차곡 꺼내지는 진도의 추억.
이런 기억들도 가지고 있었구나. 그렇네. 어린 너의 마음속에 나쁜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네.
오랜만에 꺼내보는 추억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진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곳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