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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혜경 Aug 03. 2021

우리는 슬렌포니아로 가는 사람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가자, 슬렌포니아로!



  영화 <컨텍트>의 외계인 헵타포드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시간의 한순간에 존재하는 인간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지만 헵타포드는 이미 정해진 사건을 현실로 데려오기 위하여 언어를 사용한다. 시제 사용의 불일치는 인간과 헵타포드의 공통점을 거세했지만 맥락을 이해하는 노력은 그 간격을 좁히는 데 일조했다. 이렇듯 세상에는 과학 너머의 프리즘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많다. 이것은 규칙과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공감과 인정의 문제다.


  과학은 가능성을 증명하면서 또 다른 가능성을 과제로 남긴다. 신약이 개발되면서 해결해야 할 부작용이 따라오는 것과 같다. 미래의 편리를 담보로 위험을 감수한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모험을 준비한다. 어쩌면 과학의 발달은 어려움이 산재하다는 말이며, 그것을 정복하는 시기는 질문과 질문 사이를 오가는 우리들의 태도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두려움에 빠지지만, 힘들고 어려울수록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에는 어떤 다짐이 필요한지. 그 먼 길을 소설 속에서 찾아보자.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생화학을 전공한 김초엽의 소설집이다. 일곱 편의 SF소설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사람을 중심에 둔 작가의 친절함에 있다. 과학적 사실 또는 가설을 바탕으로 구성된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으며 부단히도 반복된 실패와 아픔을 경험한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공허한 감정일 수도, 희미한 공간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기억이 집약된 끌림이 무한 작동하는 곳, 슬렌포니아. 그곳은 도착보다 여정이 중요한, 끝을 알 수 없는 우리의 삶과도 닮았다. 슬렌포니아는 이상이다. 그리고 희망이다. 기다림을 스스로 해소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그 여행의 목적은 무척 간결했다.


깊은 그리움을 위하여

  

  죽은 사람의 마인드를 홀로그램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도서관에서 분실 사고가 일어났다. <관내분실>은 평소 관심 없던 어머니의 마인드가 분실되자 지민이 어머니의 흔적을 찾는 이야기다.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한다. “언제나 엄마는 엄마였으므로, 그녀가 그냥 ‘김은하’였던 시절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251쪽) 그녀가 어머니의 마인드를 찾기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어머니의 기억과 고유성이 남아 있는 사물을 찾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은 어머니가 최소한의 흔적만 남기고 가버린, 이제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희미하게 찾은 어머니의 이름, '표지 디자인 김은하’라는 문구는 지민에게 있어서 그동안 눌러왔던 한 사람에 대한 갈망이다. 이것은 <감정의 물성>에서 사물들이 내포하고 있는 감정보다 깊은 사유를 담아내고 있다. 사람의 아이덴티티는 어떻게 불리느냐에 따라 결정되기도 한다. 개성과 의식이 사라지고 역할과 속성이 강화된 호칭은 존재감을 떨어뜨린다. 그런 의미에서 김은하, 라는 이름은 지민에게 있어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한 사람의 또렷한 '존재감'이다.





어떤 슬픔을 위하여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을 제작 판매하는 곳이 있다. ‘이모셔녈 솔리드’에서는 기쁨과 행복 말고도 우울과 슬픔의 물건을 판매한다. <감정의 물성>은 당연히 선택해야 할 행복 외에도 슬픔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실재하는 물건을 통해 위로와 환희를 경험하는 일은 착각과 망상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치유의 과정은 심리적 기제의 범위가 넓어 얼마든지 평안을 도모하는 사물이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215쪽) 그러나 우리가 아직 만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은 의미와 맥락 없이 사물 그 자체에 부여된 감정이 필요할 수 있다. 어찌 됐든 우리가 말하는 행복과 불행은 반대의 감정이 있어야 가늠할 수 있다. 우리가 비극을 즐기는 이유도 사유의 원류인 비극이 행복의 그림자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우리는 행복하지만 이 행복의 근원을 모른다는 것"(19쪽)은 릴리가 아름다움과 무병 그리고 뛰어난 특성으로 구성된 삶이 선행이라고 착각한 데서 시작된다. 결함과 질병과 얼룩은 슬픔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거듭나기 위한 과정일 뿐.





가야 할 곳, 희망을 위하여

  

  다른 행성에서의 삶은 지구의 오랜 희망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슬렌포니아로 떠날 수 없는 안나의 안타까운 사연이 담겨있다. 동결과 해동을 반복한 백일흔 살이 넘은 그녀는 가족이 먼저 떠난 슬렌포니아로 가길 희망한다. 여기엔 나름 그녀의 의지가 담겨있다. “왜 매번 죽지 않고 다시 깨어나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고, 얼마나 많이 세상이 변했는지.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다시 만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지”(180쪽) 죽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이유는 남은 이들과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한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안나가 슬렌포니아에 가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빛의 속도로 수만 년이나 걸리는 슬렌포니아에 가지 못한다면 죽음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질 것이다.







  슬렌포니아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막연하지만 시작과 함께 점화되는 곳이다.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쳤거나 한눈팔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놓았거나, 멀리 바라보다 정작 가까운 곳을 잊었거나... 여러 가지 이유를 달고 우리의 허무와 후회는 모두 슬렌포니아를 향하고 있다. 희망은 때론 무모하다. 무모할지언정 안나는 희망을 희망한다. 출발의 원동력은 단 하나의 의지로 시작된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182쪽) 안나가 빛의 속도로 그곳에 도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가족을 그리는 그녀의 눈과 희망이 슬렌포니아를 향하고 있다면, 그 여행은 언제까지나 안나의 기쁨, 그리고 우리들의 권리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외계인 헵타포드처럼 과거와 미래를 함께 볼 수 없다. 우리의 시선은 현재형이며 언제나 순간에 존재한다. 찰나의 조각들이 모여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다름과 같음 속에서 공존할 뿐이다.




*Poto by wayne dahlberg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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