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도덕적이지 않아요. 다른 것은 모두 도덕적이죠.” 이것은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피스토리우스에게 한 말이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지적했듯이 우리 의식 속에 각인된 도덕은 선과 악을 기준으로 권력 앞에서 상대적인 해석을 낳는다.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도덕에 회의감을 느낀 사상가들이 인간의 욕망과 존재 방식에 의문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기 체험과 관찰을 중심으로 도덕을 사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모럴리스트(moraliste)들이다. 모럴리스트는 관념에서 빠져나온 생활 밀착형 도덕을 추구하며, 개인이 삶에 안주할 수 있도록 거대 집단의 도덕을 혐오한다.
싱클레어 표현대로 음악은 도덕과 거리가 멀다. 음악은 개인의 해석이 전체를 대변하므로 관념에서 자유롭다. 이성과 논리가 부재해도 음악은 언제든지 도덕 너머의 세상을 탐할 수 있다. 이것이 모럴리스트가 추구하는 그림이다. 음악을 소설 안으로 초대하면 어떨까. 서사에 어떤 파장이 일어날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야나 체크의 ‘신포니에타’를 들고 『1Q84』를 완성한 것은 아오마메를 묘한 세상으로 호명하기 위함이다. 스티븐 갤러웨이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속에는 ‘아다지오 G단조’가 흐르고 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을 잠재우기에 충분한 선택이었다. 광활한 광장의 언어를 간결하게 그려낸 ‘대부 테마곡’은 어떨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녹턴』은 대중을 끌어들이는데 일조했다. 이외에도 음악은 장르 구별 없이 플롯의 작위적인 균열을 자연스럽게 메우고 있다.
음악이 갈등을 종결하거나 인물 간의 매개물로 작용하면 독자는 자기 승화를 경험하게 된다. 작품이 요구하는 바와 자기 구원 욕구가 만나면서 서사 안에서 질료로써 최상의 역할을 수행한다. 좀 더 구체적인 접근을 위해 음악이 가미된 소설 중에서 모럴리스트 읽기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두 편의 작품을 살펴보자. 소개할 작품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슌킨 이야기』이다. 두 작품의 분석은 협주곡을 닮았지만 솔로이스트(soloist) 역할은 사건의 특성과 인물, 상황에 따라 교차된다. 사랑을 위해 음악이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과 인물들의 심리 변화가 비교적 유사하게 흘러간다는 공통점을 기준으로 삼았다.
크레센도, 점점 세게
프랑수아즈 사강의 대표작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작품은 사랑이라는 이유로 두 남자 사이에서 한 여자가 갈등하는 이야기다. 서른아홉 살 폴은 오랜 연인 로제를 사랑하지만 열네 살 연하 시몽을 만난 후부터 내려놓을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산다. 로제에 대한 폴의 사랑은 권리보다 의무에 가깝다. 오히려 시몽을 향한 사랑이 그녀가 꿈꾸던 프레임이다. “진중하게 내린 결정은 운명의 목소리와 결부되었다”라고 베토벤은 말했다. 덕분에 필연적인 것이 진중하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다는 의미를 폴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의 사랑이 처음 발현된 곳은 시몽의 차 안, 떨어지는 빗방울과 연탄곡(連彈曲)을 의도했는지 “그녀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p.24) 로제의 차에서 라디오를 켜는 횟수가 지루함을 유발했다면, 지금 시몽의 차 안은 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만약 음악이 도덕에 가까웠면 시몽은 로제보다 후 순위로 밀려나야 맞다. 그러나 그녀의 노래는 사랑의 언어로 증폭되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P.44)
음의 세기를 말할 때, ‘점점 세게’를 의미하는 ‘크레센도(crescendo)’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질주할 때 사용하는 기법이다. 사랑에 넓이와 깊이를 더할 때 필요한 이 에너지는 시몽이 모럴리스트를 정직하게 이행하도록 돕는다. 그는 개인적인 언어로 사랑과 죽음을 정의하고 선고나 마찬가지인 메시지로 폴의 마음을 압박한다. 크레센도의 힘이 두 사람을 강하게 밀착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슌킨 이야기』는 아홉 살 때 시력을 잃은 슌킨과 그녀를 말없이 사모하는 사스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이다. 사스케가 슌킨을 사모하게 된 배경엔 ‘샤미센’이라는 악기가 있다. 그는 슌킨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음곡을 귀에 익히고 밤마다 텅 빈 벽장에 들어가 샤미센 연습을 한다. 「눈」이라는 곡을 몰래 연주한 밤, 드디어 그의 음악성이 세상에 드러난다. 가락의 구별과 가사, 소리의 높낮이와 곡조까지 오직 청각의 기억에 의지한 사스케의 마음은 크레센도의 속도를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다.
델리카토, 섬세하게
대여섯 곡만 연주할 수 있는 사스케가 슌킨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혼신의 힘을 다해 샤미센을 연주하는 장면은 『슌킨 이야기』를 도덕 너머로 인도한다. 이어서 사스케가 어깨너머로 배운 「흑발黑髮」과 「다음두茶音頭」라는 곡이 우아하게 펼쳐지면, 그의 사랑은 선율에 올라타 슌킨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드디어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지만 슌킨의 거부로 아이는 다른 곳에 보내진다. 도덕을 신념으로 삼았다면 자식을 버리는 일은 불가능한 행위다. 물론 모럴리스트들의 기억에도 그런 역사는 기록되지 않았다.그녀는 오직 샤미센을 가르치며 애써 도도함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원한 때문인지 누군가 잠든 슌킨의 얼굴에 뜨거운 물을 부었고 그녀는 절망 속에서 또 다른 운명을 맞이한다. 이때 슌킨의 그림자만 쫓던 사스케는 특별한 결심을 한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괴로워하는 슌킨을 위해 두 눈을 바늘로 찔러 실명을 자처한 것이다. 그의 악행은 예리한 바늘을 통해 슌킨과 사스케를 어둠에 공존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델리카토(delicato)는 ‘섬세하고 우아하게’라는 용어로 음악이 절정에 이를 때 필요한 기법이다. 사랑도 깊어질수록 델리카토 과정이 필요하다. 사스케를 맹인으로 내몰던 용기는 무모했지만, 그의 섬세함은 슌킨의 마음을 독차지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쯤 되면 그들의 샤미센 연주는 고통과 고독 사이에서 하나의 줄을 선택해야 하는 슬프고도 외로운 외줄 타기로 읽어도 무방하다. 한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시몽이 폴에게 건넨 푸른 쪽지에는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문구가 담겨있다. 연주회 초대를 위해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묻지만 시몽의 내면은 폴 등 뒤에 서 있는 로제를 의식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진실에 대해 물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재확인하려는 시몽의 델리카토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우아한 문장은 ‘차 한잔하실래요’처럼 관용어로 사용되면서 사랑을 위한 멜로디로 작용한다. 반면 열여덟 살 때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꿈꿨던 로제는 자신의 꿈을 음악보다 많은 여자를 탐하는 데 소비한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폴을 향해 치밀한 거짓 사랑을 반복하지만, 우아하고 섬세해야 할 델리카토를 오용(誤用)한 결과다.
도돌이표
원하는 부분을 되풀이해서 연주하도록 지시하는 기호를 ‘도돌이표’라고 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도 되풀이 과정이 발견된다.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시몽과의 관계를 정리한 폴이 로제에게 회귀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도돌이표는 로제에게도 공평하게 작동되어 그가 범했던 과거의 탐욕을 재소환한다. 로제에게 전화가 왔을 때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폴은 이미 알고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p.150) 과거 로제가 거짓을 숨기기 위해 습관처럼 둘러댄 말이다. 결국 로제는 현재에 존재하지 못하는 과거를 복제하는 존재가 되었다. 과거 지향형 인간이다. 모럴리스트의 순기능을 거세한 자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다.
『슌킨 이야기』에서는 어떤 회귀가 실천되었을까. 사스케는 맹인이 된 순간 “이 침묵의 몇 분간만큼 행복을 느낀 적이 없었다.”(p.121)라고 이야기한다. 슌킨과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관능의 감각을 사스케 안에서 싹트게”했다. 그 결과 비로소 두 사람이 하나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다. 사스케에게 슌킨의 아름다움은 절대적인 것으로, 그 세계는 실명 덕분에 견고하고 아름답게 유지된다. 제대로 활용한 반복은 음악을 극대화한다. 음악이 과거로 복귀하는 것은 쓸모 있는 리듬과 멜로디를 구제하기 위함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반복된 실패를 반성해야 다가오는 실패를 건너뛸 수 있다. ‘적당한’ 그리고 ‘정당한’ 반복만이 도돌이표의 필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폴과 『슌킨 이야기』의 사스케는 스스로를 지휘할 수 있는 모럴리스트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 연주될지 자각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브람스의 3번 3악장이 기존의 음악성을 벗어나 강렬한 서정성을 완성한 이유는 폴과 시몽의 관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브람스의 사랑을 애틋하게 관람한 프랑수아즈 사강이 자신의 작품 속에 ‘브람스’를 초대한 것이다. 텍스트에 삽입된 첼로 연주는 독자에게 낯선 감흥을 선사한다. 이 작품에 브람스가 도착하지 않았다면 폴과 두 남자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샤미센은 나무로 만든 틀에 세 개의 현을 달아 음을 내는 악기다. 울림이 길지 않아 대부분의 곡에 사용된다. 이 작품에 샤미센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사스케는 어떤 이유로 슌킨 곁에 머물 수 있을까. 음악이 사라진 두 작품을 상상하면 플롯의 핍진성도 떨어지고 무미건조해진다. 무엇보다 멜로디가 사라진 암흑과도 같다.
두 작품의 협주곡을 이제 마친다. “모든 것이 리듬이다. 모든 예술 작품이 하나의 유일한 리듬이듯 인간의 모든 운명은 하나의 단일한 천상의 리듬이다.” 휠더린이 더듬거리며 읊던 이 말을 누군가 받아 적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몇 개의 리듬으로 어설프게 규정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감각도 예외는 아니다. “음악은 도덕적이지 않아요. 다른 것은 모두 도덕적이죠.” 싱클레어의 문장을 사람들이 오래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꿈꾸는 모럴리스트 그리고 돌아갈 그곳을 위해 연주는 계속 이어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