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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혜경 Nov 08. 2024

형태의 소멸

금각사 | 미시마 유키오

열등감은 세상을 굴절시킨다. 겉으로 드러난 결점은 시선의 폭력을 견뎌야 한다. 태어날 때부터 말을 더듬었다면 욕망은 말보다 행동을 등 떠밀게 되며 어떤 상황이든 손이 먼저 나가는 행위의 편리성만 따르게 된다. 만약 안짱다리라면 어떨까. 상황이 다르지 않다. 최소의 행동은 최대한의 발언 뒤에 숨어 몸에 써야 될 에너지를 의미를 조합하거나 꾸미는데 소모한다. 타인에게 안 좋은 인상은 사회의 부정과 함께 세상을 어긋나게 만든다. 이 그림은 얼마나 치열한가. 배경은 21C의 풍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간의 버튼을 어느 방향으로 돌려도 비슷한 장면이 포착되며 관련 기록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날 그날은 1950년 7월 2일 새벽.


금각사의 도제 하야시 쇼켄은 어눌하고 말을 더듬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를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라고 생각하며 텅 빈 공간이 방치되듯 자신의 모든 것을 비하한다. 자신을 향하던 손가락질이 안으로 마구 파고들었다. 스스로 밀어내지 않아도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자동적으로 밀려날 위기다. 그러던 중 그는 금각사의 화재경보기가 고장 난 것을 알게 된다. 자신과 상반된 대상을 파괴하는 게 최선의 보복이었을까. 이윽고 금각에 불을 지른다. 그날 그곳엔 완전함의 대명사 금각이 불완전한 남자와 같은 값으로 추락하기 위해 활활 타고 있었다.


금각사 |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미학’이라고 평가받는 <금각사>는 미시마 유키오가 실제 방화범 하야시 쇼켄의 이야기를 소설에 담아낸 것이다. 작품은 말더듬이인 미조구치와 안짱다리인 가시와기를 통해 인식과 행위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접하게 된 금각은 미조구치에게 절대적 미의 상징이다. 완벽한 형태와 자연의 흐름에 맞게 시시각각 변하는 금각의 모습은 질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폭우에도 자태를 지키는 금각은 찾아오는 사람들의 관심에도 무관심할 정도로 흔들림이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기울어지는 미조구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흠모했던 우이코를 몰래 훔쳐보던 일, 그녀의 죽음 뒤에 찾아온 혼란, 전쟁에 출전하는 사관과 임신한 여자의 이별, 가시와기가 부잣집 딸을 유혹하는 모습 등 미조구치가 목격한 세상은 아슬아슬한 절벽 끝 순간들이었다.


안짱다리인 가시와기는 행위보다 인식자로 존재한다. 세상을  변모시키는 것은 인식뿐이며, 다른 어떠한 것도 세계를 바꾸지 못한다고 믿는 인물이다. 인간은 삶을 견디기 위해 인식을 무기로 삼으며 동물은 견딜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인식은 인간의 유일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미조구치가 미의 극치라고 여기는 금각의 존재도 어쩌면 인식의 보호 아래에서 무사안일한 유지가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곧 무너질 것 같은 감정이 들 때마다 그에게 금각이 떠올랐다. 그의  불완전한 형태를 채우기라도 하듯 금각의 아름다움이 도드라졌다. 말을 더듬기 때문에 행위자로만 호명되는 미조구치에게 금각에 대한 인식은 미 그 자체다. 단순한 정의 외에는 어떠한 의미도 구사할 수 없다. 그럴 때마다 금각의 아름다움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노사로부터 후계자로 삼을 계획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결심한다. 인식이 이끄는 첫 행위가 시작된 셈이다. 그에게 남은 행위는 단 하나. 금각은 자살과 함께 불태워야 할 대상이라는 것. 아름다운 형태를 파괴하는 것만이 자신의 형태를 살리는 길이었을까. 절친 쓰루카와의 죽음이 사고가 아닌 자살이었다는 사실이 행위자의 활시위를 팽팽하게 만들었다.




국화의 단정한 형태는 꿀벌의 욕망을 본떠서 만든 것이며, 그 아름다움 자체가 예감을 향해 꽃 피운 것이니, 지금이야말로 삶에서 형태의 의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형태야말로 형태도 없이 유동하는 삶의 거푸집이며, 동시에 형태도 없는 삶의 비상은 이 세상의 모든 형태의 거푸집인 것이다...... 230쪽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주인공 미조구치 내면에 자신의 허약함을 이식했다. 가령 건장한 하야시 쇼켄의 모습을 배제하고 미숙아로 태어나서 왜소했던 미시마 자신을 투영한 것이다. 실제 사건과 미시마가 구축한 이야기는 약간의 간극이 있으나 금각의 아름다움과 한 인간의 추악함이 실제와 상상의 공통점임은 분명해 보였다. 아버지의 뜻대로 금각의 도제가 된 미조구치는 아름다움의 극치 금각을 신격화했다. 시간을 넘나드는 황홀함. 불변의 미, 그것을 응시하는 인간의 흔들림 그리고 허무함. 미의 파괴는 그에 대한 숭배의 소멸이며 이때 타고 남은 재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동격이 된다.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말에 의하면 구조나 설계는 심미적 고려보다 용도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에서 시각적 접근이 우세하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형태에 기대어 인식하는 경향이 크다. 기능에서 출발한 형태가 미를 취할 때 최고의 아름다움이라 평가한다. 형태는 곧 아름다움이고, 형태는 기능을 따르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곧 기능과 가까운 이웃이라고 할 수 있다.  형태는 보이지 않는 욕망의 거푸집. 그것은 파괴를 파괴하고 불멸을 꿈꾼다. 형태는 복원되고 진화한다. 금각을 불태워도 근원은 태울 수 없다는 의미다. 형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존재한다. 욕망이 소멸되지 않는 한. 자살을 희망했던 미조구치가 활활 타오르는 금각을 바라보며 ‘살아야지’했던 것처럼.



Photo by analogi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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