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뭘 고민해요. 지금 바로죠." 그때 난 주저 없이 말했다. 사람들은 비공개 밴드를 개설하고, 마음에 드는 노트와 펜을 샀다. 어떤 여자는 터닝 포인트가 됐다며 고맙다고 했다. 눈동자가 또렷해졌으며 굽은 어깨가 직각으로 펴졌다. 두 손을 맞잡고 다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테이블 아래 있는 두 손을 힘차게 깍지 낀 남자도 있었다. 난 오래 고수해왔던 영업비밀을 술김에 발설한 맛집 셰프라도 된 것처럼 어깨를 으쓱 올리며 더 그럴싸한 말들을 입속에서 찾았다. 이럴 때일수록 말을 아껴야 된다고 생각한 후 더 이상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시간이 천천히 흘렀지만 타인의 각오와 기쁨을 바라보는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입에서 나온 말들이 귀소본능에 따라 나를 파고들었다. 곧 작게 이렇게 말했다. 뭐라는 거야. 내가 할 소린데... 그 소리는 귀가 아닌 마음을 진동하는 방식으로 전달됐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지막하게 전해지는 의미는 언어보다 이미지에 가까웠다. 갑자기 빈센트 방의 노란 침대가 떠올랐다. 몇몇 사람들은 노란색을 질투 또는 불안의 상징으로 이해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빛이 스스로 제 몸을 깨트려 작성한 초대장으로 읽혔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노란 침대에 앉아 초대에 응했다. 정확히 내 무게만큼 가라앉은 침대는 자신의 역할을 그것으로 만족했는지 어떠한 울림도 허락하지 않았다.
1889년. 빈센트 반 고흐
눈을 감으면 경계가 사라진다. 시간과 공간의 필요가 불필요해진다. 몰입하기 쉬워진다. 이 말은, '뭐라는 거야. 내가 할 소린데...'의 주체를 파헤치기 쉽다는 말과 같다. 나에겐 오늘처럼 가끔 아주 가끔 알 수 없는 생각들이 떠오른다. 출발과 도착이 똑같은, 내 안의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일종의 후회와 반성이겠지만 그 안에 뭐가 더 있는지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이왕 빈센트 방에 발을 들였으니 회피하지 않고 싶다. 책에서도 읽었듯이 이곳은 언제나 고요하며 침대는 하염없이 잠자고 있을 테니 나의 깨어남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왜 빈센트가 떠올랐을까. 엊그제 정여울의 책을 읽다 문득 이 분도 빈센트를 좋아하는구나. 겉으론 강해 보이지만 이분이야말로 내유외강이구나, 생각했다. 그녀가 빈센트의 힘을 빌려 자신의 성장을 서술한 부분에 크게 공감해서 오늘 빈센트가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빈센트와 정여울의 교집합에 내가 들어오다니... 그러고 보니 정말이지 작년엔 참 바빴다. 하고 싶은 일들이 '해야 할'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순서도 지키지 않고 나를 두드렸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일에 손과 발이 빠른 나지만 멀티태스킹이 아닌 멀티트래킹(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을 하고 있을 때도 많았다. 그만큼 정신 빠진 정신과 앞뒤 잴 수 없는 판단력으로 무턱대고 들어오는 일들을 많이도 마무리했다. 그 대가로 내게 남은 건, 빈센트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발바닥에도 못 미치는 책조차 들춰보지 못한 무지와 이름 없는 오솔길이 이름을 갖는 일에 소홀하도록 내버려 둔 무관심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여백 어딘가에 내 언어를 쏟아내지 못한 미련뿐이다. 통장에 찍힌 검은 숫자들의 행렬이 내 잔고를 더하기 하고 있을 때 내 가슴속에선 생각보다 많은 뺄셈이 나의 영혼을 하나씩 지우고 있었다. 그때 가까스로 들려온 말, 뭐라는 거야. 내가 할 소린데..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느낀 건 내 고민이 타인의 그것과 같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까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글을 쓸 수 있을까의 고민과 연결된다. 그런데 나만 쏘옥 빼고 아닌 척 그들만 그러겠거니 내심 연기를 하곤 했다. 내 것은 안으로 감춘 채 타인의 결점만 풍선처럼 크게 불어넣고 “에이, 뭘 고민해요. 지금 바로죠. 바로 쓰세요."라고 말이다. 누군가의 비공개 밴드가 따뜻한 글로 가득 채워지고, 그들의 노트와 펜이 수명을 다하고, 그 남자의 깍지 낀 두 손이 여태 힘을 내고 있어도 나는 모른 체와 안일함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까. 이 '고민'을 번역(내가 이 문장에 번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고민에 핑계를 덧대어 정당화를 펼칠 게 뻔하기 때문) 하면 '게으름'만 남는다. 잘 쓰려는 희망보다 '쓰다'라는 동사만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잘'이라는 핑계를 앞세워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글쓰기의 영역을 만들고 영감 따위를 입버릇처럼 내세워 게으름을 피웠다. 이것이 내 영혼이 집을 나간 가장 큰 이유다. 긴장이 풀린 이유도 크다. 봄부터 바쁘게 돌아가던 일들이 하나둘 마무리되면서 늦가을부터 어깨의 힘을 빼기 시작했다. 짧은 여행이 잦은 잠수를 부르자 잠수가 침몰을 야기했고, 써야 할 글들 머리에 이유를 줄줄이 사탕처럼 매달았다. 지금도 먼지처럼 쌓인 게으름들이 풀풀 날리며 이곳의 공백을 설명하고 있다.
평생을 불안정하게 살았던 빈센트 방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하니 노란빛이 내 안을 환기시킨다. "너의 시제는 어쨌든 지금 바로야." 이 울림이 귀보다 마음에 먼저 닿자 노란 구멍이 뚫렸다. 그 틈으로 빛이 다시 들어오고 있다. 새로운 초대장이 날아왔다. 초대에 응하려면 지금 바로 깨어나야 한다. 그들의 교집합에 가까이 갈수있도록 흉내라도 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