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혜경 Feb 28. 2022

파티가 끝난 후

무대 뒤의 모습



큰 소리에 잠에서 깼어요
ⓒ마혜경


마리우폴에 사는 어린 소년이 눈을 비비며 인터뷰에 응했다. "큰 소리에 잠에서 깼어요." 아침이면 유치원에 가고, 낮엔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밤이면 부족했던 놀이를 꿈속에서 경험하는 아이에게 잠을 깰 정도의 큰 소리란 무엇일까. TV도 아니고 자동차, 음악도 아니다. 그것은 약속이 깨지는 소리다.


약속은 공정했다. 비겁한 노력은 최고를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든 어기는 자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페어플레이가 중요한 올림픽에서 약속이 이행되지 않으면 퇴장 또는 벌점이 추가되거나 승리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이미지도 실추되지만 무엇보다 뼈아픈 대가를 치러야 한다. 다시 출전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며 도핑이라는 죄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자신의 실력을 정직하게 키워내야 한다.


그럭저럭 약속은 실천되었고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무사히 막을 내렸다. 승리자의 목에 걸었메달의 색깔이 비슷해질 무렵 지구 한편에서 펑, 하며 충격이 전해졌다. 바이러스가 아닌 폭격이다. 우크라이나를 향한 러시아의 저주.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굉음 평화를 깨뜨리는 중이다.


러시아의 리더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파견하고 유럽 전역에 군사적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미국과의 충돌을 간접적으로 야기한 러시아의 모습에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푸틴의 야망은 과거에 있으며 미국과의 냉전 종식을 다시 재조명하자는 데 함축적 의미가 있다. 푸틴이 생각하는 과거에 대한 불만은 이렇다. 과거 30년 동안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를 바라보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러시아는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보복을 포함한 어떠한 조치도 취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향한 총구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동의할 수 없는 자기들만의 정당화가 숨어있다.


차라리 사실대로 고백하지.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때문에 줄곧 악몽에 시달린다고. 그래서 찬란했던 과거를  Ctrl C + Ctrl V 하고 싶다고. 그들이 복구하고자 하는 과거는 1990년이다. 소련이 붕괴되고 그로 인한 자국의 군사력이 위축되기 직전의 시기 말이다. 그런데 오늘의 비극이 푸틴만의 결과일까. 푸틴의 양 어깨에 힘을 조용히 실어준 조력자는 정말 없는 걸까. 중국과 러시아의 유대감은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포착되었다. 베이징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푸틴이 시진핑과 회담을 빙자한 은밀한 딜을 했을 거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이 위협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NATO는 1949년에 창설된 군사동맹을 말한다. 배경은 유럽과 북미이며 한 국가에 대한 공격을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겠다는 집단적 방위 권한 조치로 국가 간의 약속이다. 물론 러시아가 연대의 힘을 위협으로 읽는 실수는 무리가 아니다. 나토 출범이 러시아의 유럽 확장을 침묵으로 견제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에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창설해서 대응한 심리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다고 신사다움을 어서는 안된다.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계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러시아가 같은 인종과 핏줄을 강요하며 간섭하지만 그들은 사회, 문화적으로 다른 행보를 걷길 원한다. 친서방 정책을 펼치며 나토 가입에 긍정의 뜻을 밝히고 있다. 러시아의 오해가 폭력으로 행사되어선 안 되는 이유다.


과거는 반성과 승화를 위해 소비되어야 한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침범하면 항해 중인 배를 뒤집어 타는 꼴이다. 나토의 목적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에 있다. 이것을 오역한 푸틴 이하 관계자들은 부디 오해 마시고 어떠한 두려움이나 공포로부터 벗어나시길.


파티는 끝났다. 공정하다는 슬로건을 실천했던 사람들이 이제 무대 뒤에서 공정성을 진지하게 지켜나갈 차례다. 올림픽 정신은 메달에만 있는 게 아니다. 메달을 걸었던 목에도, 메달을 기원했던 두 손에도 이 모든 걸 준비하고 지켜봤던 우리의 마음속에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1994년에 핵을 포기했다. 강력한 평화의 메시지다. 결정이 후회가 아닌 현명한 판단이었다는 말이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질 수 있도록 이제 세계가 다 같이 증명해야 한다. 그 증명 아래, 더 이상 잠을 깨는 아이도, 눈물 흘리는 여자도, 쓰러진 남자의 억울함도 바로 일어설 수 있다. 마리우폴에 사는 어린 소년이 늦잠을 잘 수 있도록 조용한 세상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재, 구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