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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혜경 Feb 07. 2020

하마르티아, 프레임을 잡다

카메라 | 권여선




Book DB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등단한 권여선의 작품은 플롯의 구조가 탄탄하며 간결하다는 특징이 있다. 단편이라는 지면의 한계를 서사의 조밀한 밀도로 채울 수 있는 것은 권여선 만의 내공이다. 「카메라」는 그녀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에 수록된 일곱 편의 단편 중 하나로  술, 고독, 가난을 좋아하는 작가는 「봄밤」에 이어 인간관계의 주된 관심사 ‘소통’의 메시지를 이 작품에 이식한다. 권여선 작품의 지향점은 사랑과 죽음이라는 공통분모로 어둡고 처절한 현실을 가볍고 명랑하게 이끄는 데 있다


「카메라」의 이야기는 주인공 문정이 관희가 보낸 카메라를 택배로 받으면서 시작된다. 그녀는 과거에 관희의 동생 관주와 두 달 남짓 비밀연애를 한 적이 있다. 문정이 사진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자 관주는 조교가 되면 카메라를 사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영화를 보는 어느 날, 이유 없이 헤어지게 되고, 그 뒤 서로 연락도 없이 관계는 끝이 난다. 문정은 라디오 프로그램 팀원 모임에서 오랜 동료였던 관희를 만나 관주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듣게 된다. 조교가 된 관주는 월급을 타자마자 약속대로 카메라를 샀지만 골목에서 불법체류자를 찍었다는 이유로 그 남자에게 카메라를 빼앗기고 피하려다 그만 뒤로 넘어져 포석에 머리를 박은 채 사망하게 된다. 관희는 문정과 관주의 관계를 아는듯하지만 문정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알은체하지 않는다. 문정 또한 관주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몇 안 되는 인물을 중심으로 단순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된다 하더라도, 프레임에 담긴 모습은 수많은 모습 중 단 한 장으로 제한된다는 것이다.








스포츠 서울




프레임을 엿보다


인간은 관계지향적이며 타인에게 대부분의 감정을 소비한다. 모든 감각 중 많은 부분을 시각에 의존하는 현대인은 타인에게 호기심이 극대화되어 있다. 그중 인간의 ‘엿보기’ 심리는 욕망을 충족하기에 가장 손쉬운 일이며, 본능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이 심각하게 변질된 욕구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며 관음증 양상으로 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보행 중에도 상대방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그것의 목적성은 타자의 일상과 생각에 호기심을 품으며 자신의 욕망을 대입하는 데 있다.


‘엿보기’는 하나의 프레임을 통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거나,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시공간적 상황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시선을 타인에게 둠으로써 금기의 간극을 깨는 간접적 태도로 작용한다. 대상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닌 대상에서 떨어져 나와 그것을 타자로 응시함으로써 얻은 쾌락이 ‘성적 본능’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한 바 있다.


「카메라」의 특징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자주 이동하는 것이다. 이는 카메라의 프레시가 화자의 심리와 맞닿아 화자의 심리를 따라 움직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처음 서술된 시간적 배경은 현재로, 문정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그 일은 어쩌면 10년 전에 지자체의 책임자가 그 길을 다시 포장하면서 아스팔트 대신 돌길을 깔기로 결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2년 전에 문정이 관주에게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정확히 말하면 1년 9개월 3일 전이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난 게 1년 7개월 24일 전인데, 문정은 그보다 39일 전에 그 얘기를 했다. 지나가는 말로 해본 소리였다. 사진을 배워서 찍고 싶어. (p.110)


1년 9개월 3일 전에 문정이 관주에게 카메라에 대한 관심을 언급했고 관주는 카메라를 사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들은 39일 후, 현재로부터 1년 7개월 24일 전을 마지막으로 헤어지게 된다. 문정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원인을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근접한 답을 유추한다. 그것은 아마도 10년 전에 지자체에서 그 길에 돌을 깔기로 결정한 데 있다는 것이다. 문정이 이렇게 근접한 답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몇 장의 프레임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사진 한 장은 추억이나 상황 즉 뉘앙스를 보여줄 뿐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함구하고 있다.


작품은 많은 정보를 말하지 않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이가 여러 장의 사진을 보면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행위와 유사하다. 이 작품의 초반 모습은 그런 의미에서 몇 장의 컷으로 잘린 사진과 흡사하다. 독자는 서로 다른 과거를 컷 해서 여러 장의 프레임을 소유하게 된다. 이어지는 프레임은 현재와 좀 더 가까운 과거로 이동한다. 시간은 지난주 목요일 저녁 라디오 프로그램 팀원 모임이다. 모임을 파한 후 문정과 관희는 지하철로 향한다. 전철역을 향해 걷다가 개찰구를 통과하고 나서 관희가 문정에게 어디서 내리는지를 물었다. 문정이 내릴 역을 말하자 관희가 걸음을 멈춘다.


“네?”

문정은 자신이 내릴 역을 한 번 더 말해주었다. 관희는 낮은 목소리로 그 역의 이름을 되뇌었다. 잘 모르는 역인가 싶어 문정은 이전 역과 다음 역의 이름도 말해주었다.

“알아요, 거기.”

이렇게 말하고 관희는 무거운 걸음을 떼 놓았다. 문정도 예의상 관희에게 어디서 내리느냐고 물어보았다.

"네?"

관희가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어디서 내리냐고요?”

“아, 저는 거기서 한참 지나서 내려요.” (p.114)


두 사람은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서로 자신이 내리는 역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 역에 대한 금기를 말하면 불행이라도 생기는 것처럼 서로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서도 암묵적으로는 서로 말하고 있다. 이 프레임이 가지고 있는 뉘앙스는 독자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철저하게 두 사람만 메시지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침묵에 지배되는 플롯이 돋보인다.


“아까 뉴스에 나왔다는 얘기요.”

문정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때 카메라 뺏긴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알고 싶어요?”

“모르겠어요.”

“알고 싶지 않으면 묻지 말아요.”

“알고 싶어요.”

(중략)

“죽었어요” (p.130)


문정에게 하나의 프레임이 지나간다. 실수로 불법체류자 모습을 카메라에 담다가 카메라는 빼앗기고 돌에 머리를 부딪쳐 사망한 어느 청년의 뉴스 기사와 관주가 조교가 되어 카메라를 구입했다는 이야기는 문정에게 같은 프레임으로 해석된다. 프레임은 사건의 실마리를 생략한 채 프레임으로만 존재한다. 프레임은 의미 전달이 보편적 목적이지만 「카메라」에서 그려진 프레임은 최소한의 개방만 허락하고 모든 것이 닫혀있다. 닫힘은 곧 고정과 불변 그리고 묵인으로 이어진다. 증명사진이 하나의 서사를 향해 있다면 권여선의 「카메라」에는 다양한 모습을 함축하고 있는 스냅사진의 모습이 형상화되어있다.



FCP X



비극은 우연을 핑계로 프레임을 만든다


모든 말은 듣기를 전제로 한다. 이때의 듣기는 경청을 근본으로 한다. 심도 있는 경청을 위해 침묵해야 한다. 다시 말해 듣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침묵이라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떤 대화법보다 활동적이다. 비언어적 몸짓이 상대에게 그대로 전달되면서 소통 과정 중에 올 수 있는 오류는 사라진다. 침묵에 의한 상호작용은 청각보다는 시각적 채널에 초점이 집중되며 때로는 청각의 힘보다 우월하다. 침묵은 인지하지 못해서 취하는 행동이기보다 정확한 인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다만 침묵은 말의 부재로 인해 상대와의 대화는 다른 언어를 필요로 할 뿐이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이 향유하는 침묵은 과거의 우연을 재연하며 그것의 비극을 프레임 속으로 자연스럽게 소환하는 것이다.


우연의 비극은 인간이 수용하기에 고통이 수반된다. 세상에는 신이 천진한 우연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 한 인간을 벼랑 쪽으로 살짝 밀어 떨어뜨렸을 뿐 특별한 이유도 설명도 없는 일이 무수히 존재한다. 이때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의 마지노선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침묵은 많은 것을 알지만 모르는 것이며, 말하고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침묵을 고집하는 것은 또 다른 불행을 꺼내지 않으려는 인간의 염원이라 할 수 있다.






「카메라」는 전체적으로 많은 것을 보여주지만 말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이미지는 작가가 스케치하지만 화자도 다른 인물들도 중요한 말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화자와 주변 인물 그리고 독자는 같은 맥락의 메시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하며 추론하고 해석해야만 한다.



문정은 관주에게 카메라를 배우고 싶은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관주 또한 그 이유를 묻지 않는다. 목적과 필요성이 분명한 여타의 작품들은 개연성의 공식을 자로 잰 듯 선명하게 설명하고 서술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친절한 설명도 대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이 의도적으로 침묵을 하는가 하면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문정은 관희를 만나 술을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이 해야 할 이야기는 함구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간접적으로 묻고 대답하면서 정작 지름길을 두고 돌아가는 일을 반복한다. 두 사람은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서로 내리는 역을 묻지만 대답도 질문도 희미하다. 이것은 알고는 있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비극을 침묵으로 애도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작품 말미에 가서야 그 이유를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책장을 덮고부터 질문에 사로잡힌 독자라면 권여선의 선물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문정 씨는 남동생 없어요?”

관희가 물었다. 문정은 몸을 덜덜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있었으면 이름이 뭐였을까?”

문정은 관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문기, 김문기, 김문정, 김문기.”

“우리 관주 휴대폰에 그런 친구가 있었어요. 김문기.” (p.132)



이쯤 되면 관희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추측을 하게 된다. 문정은 이해할 수 없다며 일축하지만 그 또한 다 알고 있음을 암시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질문과 답이 오가는 형식이 아니다. 관희의 일관된 질문이다. 그러나 그 질문 속에는 모든 해답이 들어있다. 문정의 침묵이 그것을 대변한다.





어긋난 화살, 프레임을 관통하다


‘하마르티아’는 ‘화살이 과녁을 비껴가는 일’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불행을 말할 때 자주 거론하는 의미로, 비극이란 인간의 악행이 아닌 어떤 ‘하마르티아’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마르티아가 단순한 판단 착오나 실수인지 주인공의 도덕적, 성격적 결함인지는 아직 논란거리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하마르티아의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다. 비극은 필연과 우연의 가면을 쓰고 다가오고 인간은 결국 그것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오직 하마르티아에 대한 저항은 호기심으로 발현된다. 「카메라」에는 여러 개의 하마르티아가 포착된다. 그것은 단순한 사건 서술로 하나의 프레임을 형성하지만 그 외에 어떠한 정보도 발설하거나 책임지지 않는다.



10년 전에 지자체에서 그 길을 다시 포장하면서 돌길을 깔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1년 9개월 3일 전에 문정이 지나가는 말로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p.136)



문정과 관주, 관희 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의 잘못된 선택에서 시작했을 가망성이 크다. 그러나 어떠한 잣대로도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이 처한 현실이다. 지자체에서 그 길에 돌을 깔지 않았다면 관주는 그날 기분 좋게 사진을 찍었을 테고, 카메라는 문정에게 무사히 건네 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 남자가 불법체류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보다 앞서 문정이 카메라를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돌길은 원인 제공 대상에서 제외된다.


여러 변수를 차치하고라도 문정이 관주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욱 안전한 스토리가 된다. 지자체가 그 길에 돌을 깔았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시민들을 위함이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하게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함이다. 한 사람이 뛰어가다가 뒤로 넘어져 사망할 변수까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는 불법체류자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완벽하게 근절하지 못한다. 사회는 그저 조용히 다수의 안녕을 위해 묵인하는 중이다. 이 외에도 사회가 침묵을 보이는 형태는 다양하다. 불법을 알면서도 관례라는 꼬리표로 눈감아주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들의 행복 이면에는 당연히 관주 같은 피해자가 있기 마련이다. 살기 위해 몸부림친 불법체류자의 입장에서는 또 어떠한가.


세상은 카메라의 포커스를 어디에 두냐에 따라 피의자와 피해자가 바뀌게 된다. 문정은 과거 프레임을 꺼내 ‘만약’이라는 공식을 대입해본다. 다양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지만 인간의 삶은 예측 불가능이다. 하마르티아가 작동했는지의 유무는 중요치 않다. 무엇보다 사회가 생산한 피해는 사회 스스로가 묵인함으로써 결론 내려진다. 그 묵인의 비밀을 깨기 위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프레임을 설정하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이런 사실은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알려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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