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혜경 Apr 08. 2020

저마다의 불행, 무죄

안나카레니나 ㅣ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때로는 한 권의 소설이  사랑이 될 수 있다


낯설지만 어디서 들은 듯한 이야기가 있다. 어디서 본 듯한 사건이 있다. 소설 속 분위기가 그렇다. 우리는 소설의 서사를 '허구'라고 말한다. 허구는 '그 순간 실제 일어나지 않은 일'을 뜻하지만, 앞으로 '영영 일어나지 않을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매일 같이 건너 건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소설 속 이야기라는 이유만으로 "아 참, 허구였지"하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꺼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허구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이야기쯤으로 치부한다. 허구의 근본적인 알맹이는 지나친 채, '거짓'이나 '꾸밈'이라는 껍데기에만 의존한 결과다. 그래서 소설이라는 장르를 자기 계발서 뒤로  밀어놓거나 담을 쌓는 실수를 반복한다. 이런 단조로움은 자신의 스토리조차 읽지 못하는 난독증을 유발하며 메마른 감성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소설을 어떻게 즐겨야 할까. 학교에서 배운 대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적당한 거리두기를 유지하되 자신만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인물, 사건, 배경 등 작가가 열어 놓은 길에 오르기만 하면 그만이다. 이때 작가의 리얼리즘 추구 정도에 따라 독자는 서사와 겹쳐지기도, 평행선을 유지하기도 한다. 배우가 어떤 한 인물을 연기할 때 오롯이 그 인물로 존재하듯, 독자도 소설을 접할 때 유독 한 인물이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책 속에서 가능한 일이지만 배우가 그렇듯 독자 또한 동일시된 인물을 일상까지 끌고 와 한동안 그 인물로 살아갈 때가 있다. 그 인물은 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거부에 가까울 때가 많다. 내면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약하거나 아픈 인물에 자주 끌리게 된다. 이런 심리를 경험하기에 좋은 오래된 작품 하나를 만나보자






러시아의 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스토이는 어떤 사건 하나를 목격하게 다. 이웃에 사는 여자가 자신의 남편과 가정교사 사이를 의심한 후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건인데,  일은  훗날 <안나카레니나>라는 작품으로 탄생한다. 19세기 러시아 귀족계급의 결혼상을 반영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극찬한 <안나카레니나>는 영화와 뮤지컬로도 유명하다. 사랑의 민낯을 논할 때 자주 거론되는 작품으로, 현재까지도 인생의 교양과목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리디북스




사랑을 바라보는 상대적 감정


고위 공직자 남편을 둔 안나는 누가 봐도 화려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굳이 그녀에게서 근심을 찾아야 한다면 상의 따분함 하나다. 여러 벌의 드레스와 매번 열리는 파티, 이를 두고 외부에선 행복이라는 말로 규정하지만 안나 자신에겐 반복된 패턴일 뿐 색다른 이벤트는 아니다.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안나에게 어느 날 특별한 임무가 주어진다.  일은 톨스토이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며 이야기는 안나를 또 다른 사건으로 유인한다.


톨스토이가 목격한 이웃의 사건은 작품 속에 들어와 안나의 오빠 오블론스키에게 전이된다. 오블론스키와 가정교사의 불륜은 안나를 모스크바로 향하게 만든다.  오블론스키의 행위는 낯설고 모험적이다. 그리고 이율배반적이다. 오빠를 이해 못하는 안나는 올케언니 돌리를 위로하기 위해 먼 길을 나선다. 여자라는 공감대가 생긴 걸까. 안나에게 오빠 오블론스키는 사랑을 오염시킨 주범이며, 도덕과 윤리에 위배되는 인물에 가깝다. 여기까지가 그동안 안나가 가지고 있던 철학이다. 



내 안에 들어온 사랑은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모스크바 행 기차에 올라탄 안나는 묘한 심리 변화를 겪는. 나와 브론스키는 차역에서 만나자마자 첫눈에 반하는데, 두 사람은 마치 간이역을 무시하고 오롯이 종착역을 해 질주하는 기차같다. 기다리던 승객들은 그냥 통과하는 기차가 어이없을 것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켜야할 선을 그냥 통과하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어이없다.  안나가 모스크바에 가는 이유는 오빠의 불륜을 중재하기 위함이다. 적어도 안나가 기차역에 착하기 전까지는 그 목적이 유효했다. 그곳에서 또 다른 번거로움이 생산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위선이라는 하나의 개념에  개의 모순이 존재한다. 안나 입장에서 하나는 저주받아 마땅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축복받고 싶은 감정이다. 가치관에도 균열이  생기고, 모든 것이 어긋나 보이지만, 안나 역시 오빠 오블론스키의 길을 걸으며 정의를 오염시킨다. 그렇다면 안나의 심리에 변화가 생긴 이유는 무엇일까. 기차라는 공간 속으로 들어가 보자.





기차역, 만남과 이별이 공존하다


사건의 발원지가 된 기차역은 만남과 헤어짐의 공간이다. 처음과 끝이 나란히 하나의 선 위에 위치한 기차는 시작마지막이 동등하며 언제든 방향만 바꾸면 처음이 끝이 되고 끝이 처음이 되는 극적인 곳이다.  익명의 사람들이 공존하므로 언제든 인연이 맺어질 수 있는 곳이다. 방향만 바꾸면 기차의 처음과 끝이 바뀔 수 있듯, 인연을 향한 마음도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아슬아슬한 곳이다.


쪽으로 뻗어있는 레일은 기차의 이탈을 방지하지만 다른 길을 용납하지 않는다. 가며 매듭이 엮어지기도 풀어지기도 하는 기차역은 여러 가지 변수를 안고 있다.  가능성이 안나를 흔들기라도 한 걸까. 기차는 안나의 양가감정을 싣고 달리는 중이다. 이제 오빠의 문제는 약간 빗겨 난 듯하다. 시간이 갈수록 안나의 본능적 욕구가 고개를 들 시작한다. 굳이 기차의 상징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사랑 앞에서라면 누구나 어긋나고 엉키어 숨통이 조이게 된다.



인연이 엇갈리다


<안나카레니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양한 이유로 얽혀있다. 안나가 기차역에서 만난 브론스키는 원래 올케언니의 동생 키티가 사랑하는 남자다. 안나와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올케언니가 안다면 안나는 오블론스키처럼 지탄을 받고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을 것이다. 다음으로 브론스키의 친구 레빈은 키티를 사랑한다. 키티는 브론스키를, 레빈은 키티를, 사랑은 이렇게 몇 안 되는 인물들을 드라마 속의 인물들처럼 그물 엮듯 엮을 수 있다.


동의를 구하지 않은 일방적인 사랑주변을 제치고 질서를 무너뜨리며 서로 엇갈리고 있다. 이성에서 멀어진 감정에 예기치 않은 불행은 빈번한 일, 어떠한 관계든 인연을 맺으려면 얼마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은 한순간의 배신일 수도, 두려움일 수도, 집착일 수도 있다. 얽히고설킨 관계는 서로에게 미세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한 군데에서 발생한 문제라도 도미노처럼 전파된다. 이것을 불행이라고 말한다면 불행의 성질안나가 탄 기차처띠모양으로 연결되어 한 곳에 불이 붙으면 모두가 다 타야 끝나는 것이다.



만남과 이별은 원래 같은 이름



뜨거운 욕망에 사로잡힌 안나는 브론스키와 위험한 관계를 이어가고 결국 브론스키의 아이를 임신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 카레닌은 안나를 용서하려 하지만, 안나는 그 용서마저 거절한 후 끝내 브론스키를 선택한다. 이미 카레닌과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지만,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브론스키에게 집착한다. 그러나 카레닌을 뒤로한 채 선택한 사랑은 욕망 앞에 하루하루 시들어간다. 브론스키의 사랑은 한없이 모자라고 안나의 욕망은 매번 더 큰 사랑을 원하고 있다. 마치 두 대의 기차가 반대 방향으로 교차하듯 거리는 점점 벌어진다.




상류층 유부녀가 다른 사랑을 원하는 것은 많은 질문던지고 있다. 위험한 사랑이 왜 필요했을까. 단순히 그녀의 삶이 지루해서 일까. 사랑은 유지되는 순간에도 식어가는 가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언제든 닳아버릴 소모품일까. 쓰고 버릴 정도의 도구일까. 강렬했던  느낌으로 사랑이 유지된다면 이별은 영원히 유예되거나 존재하지 않아야 맞다. 얻었다고 마음 놓거나 살피지 않으면 언제든 꺼지는 불씨의 신세가 되는 것이 사랑이다. 꺼진 불씨가 언제쯤 되느냐가 사랑이 유효한 기간인 셈이다. 그러나 브론스키와 안나의 최후는 너무 급행으로 달려온다. 떠올리기 힘든 장면이다. 욕심이 불행을 낳겠지만, 불행이 다시 욕심을 부르지 않았다면 안나의 목숨은 허비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이 영원하지 못한 이유를 든다면, 사랑은 욕망과 질투 앞에서 꺼져가는 촛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갈망하는 자에게 사랑의 끈으로 옭아매는 버릇이 있다.  단순한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안나를 거친 황야몰아 것이다. 그곳이 기차역일 뿐이다.





결국 안나는 브론스키를 처음 만났던 곳으로 향한다. 기차역에 도착한 안나는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진다. 많은 생각이 스쳤을 그 순간, 후회와 원망도 있었을까. 누구도 안나가 될 수 있지만 누구도 그 순간 안나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만남과 헤어짐이 공존하는 기차역에서 안나의 사랑이 끝을 맺는다. 사랑이 아니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그녀의 의지는 타려던 기차를 놓친 것처럼 너무 허무할 뿐이다.





안나와 비슷한 인물로 플로베르의 장편소설 「보바리 부인」의 엠마를 떠올릴 수 있다. 엠마는 샤를르 보바리라는 시골 의사와 결혼하지만, 화려하고 로맨틱한 결혼생활을 동경한다. 그러나 여러 만남을 경험하다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엠마와 안나의 욕망은 색깔과 모양이 같다. 그리고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사람의 욕망에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빠질 수 있는 늪이다. 이기적인 본능에만 헌신한다면 얼마든지 엠마 또는 안나가 되기 쉽다.


톨스토이는 잘생기고 아름다운 인물들을 주인공 삼아 비극으로 몰아가는 버릇이 있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외모가 첫 번째 원인이겠지만, 잘 차려진 밥상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삐그덕거리는 식탁 다리와 중요한 재료가 빠진 요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집착하는 것도 사랑이라면, 그것의 페르소나를 벗겨내는 것이 톨스토이의 임무이자 희망임을 작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랑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해야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에 '유통 기한'이 있다는 과학적인 증명이 존재하지만, 오래도록 변함없이 이어지는 사랑도 존재한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아닌, 레빈과 키티의 사랑이 그렇다. 키티는 처음부터 브론스키를 사랑했지만 브론스키 옆에는 늘 안나가 있었기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런 키티를 레빈은 끊임없이 바라보고 기다린다. 두 사람은 다투다가도 다시 재회하고,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침묵하고 서로를 바라본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



"난 일을 하고 있다. 난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난 잊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죽음이 있다는 것을...”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온 것인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살아갈 수도 없다.”

“그러나 이제야 내 삶은,
내 온 삶은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할 것이다.
그리고 삶의 모든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삶에 부여하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선의 의미를 지니게 되리라.”



작품 속 레빈의 모습에 톨스토이의 답이 투영되었다.
레빈은 기존 인물들이 보여주지 못한 철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는 스치는 감정보다 생각하고 몰입하는 일에 정성을 다한다. 무엇이 사랑이고 그것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그의 사랑은 기차처럼 빠르게 지나가거나 기차역의 사람들처럼 짪은 시간 오고 가지 않는다. 잔잔하게 머문다. 애걸하거나 집착이 아닌 기다리고 몰입한다. 키티의 사랑을 얻게 된 레빈의 태도는 잔디를 깎는 일처럼 단순하지만 정갈하다.


사랑은 우연히 다가올 수 있지만, 불행은 질투에서 출발한다. 질투는 사랑을 전제로 한다. 오블론스키의 배신은 돌리에게, 브론스키의 무관심은 안나에게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아이러니한 건 안나의 외도에 카레닌의 질투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시 사랑의 부재다. 브론스키가 아니더라도 안나에게 얼마든지 다른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사랑을 향해 자신의 죽음을 던지는 일은 최후의 복수일까. 사랑에 대한 배신일까. 자신의 죽음이 상대에게 충격과 상처로 다가가길 미리 철저하게 계산이라도 한 걸까. 그녀의 복수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 선택은 독자를 허무하게 만든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젓가락 행진곡


진화 생물학자인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톨스토이의 이 문장에서 영감을 얻어 <안나카레니나 법칙>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은 모두 엇비슷하고, 가축화할 수 없는 동물은 가축화할 수 없는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즉 어떤 동물이 가축으로 될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단 한 가지의 요소라도 어긋나면 가축화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레빈과 키티가 행복한 결말의 주인공이 된 계기는 두 사람이 변화를 모색하고 성장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가 두 사람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은 이유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고집과 욕망은 고정된 감정으로 고인 물과 다르지 않다. 소통하지 않고 정체된 감정은 의심과 욕심을 낳고, 결국은 스스로를 겨냥하게 된다. 작고 소박하지만 늘 변화를 모색한다면 레빈과 키티처럼 성장한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다.


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잔디를 깎는 레빈은 작품 속에서 가장 몰입을 실천한 인물이다. 고통은 불행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렇다고 죄는 아니다. 죄는 아니지만 자신이 엎지른 불행은 스스로 닦아야 한다. 넘어지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 예측 불가능한 불행이 도처에 숨어 있다고 넋 놓거나 발로 차면 더 불행해질 뿐이다. 불행하다는 것은 불행이 충분하다는 뜻으로, 불행에서 벗어날 일만 남았다는 증거, 그래서 저마다의 불행한 이유, 무죄!

매거진의 이전글 하마르티아, 프레임을 잡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