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살면서 쌓은 경험과 스스로 터득한 노하우, 그리고 습득한 지식, 정보 등 다양한 종류의 가치들이 모여 하나의 믿음이 된다.인간관계의 윤활유는 이런 각자의 믿음을 테이블 위에 꺼내어 소통할 때 활성화된다. 그러나 이때테이블을 자세히 살펴보면 말도 안 되는 것들이자리를 차지한걸 볼 수 있다. 그것의 진위를 가리는 일은 종종 언쟁으로 이어진다.이 언쟁의 원인을 두고 우리는 상대의믿음이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문제는상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것이다. 이제 마주한 두 사람의 테이블은 흔들리게 되고 결국 수평을 잃게 된다.
설득하려면논리가분명해야 한다. 생각은 주관적이라 그것이주장이 되려면 논리를 세워야 그나마 객관적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논리를 사용하는 일은 위험하다.본인의 논리가 정확한지 검열하지 않으면 착각에 빠지기 쉽다. 자신의 입맛에 맞다고 겉핥기 식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자칫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이 굳어지면 맹신이 되는데 이것은 믿음의 진위보다 타인을 강제하려는 욕심에서출발한다.
맹신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믿는 것을 말한다. 말 그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맹신은 사실과 의견 중 의견에 가깝다. 사실이 변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면, 의견과 신념은 언제든 바뀌거나 파괴될 수 있다. 그래서 맹신은 뿌리가 빈약하다. 썩은 뿌리는 외부 조건에 따라 흔들리기 쉽다. 의식과 이론을 뒤집는 책이라면 믿고 보는 우리에게 참고하면 좋을 책 한 권을 소개한다. 출판사에서 기획과 편집으로 이름을 알린 강창래 작가가 무엇이든 맹신하려는 사람들에게 다섯 가지 이야기를 전달한다.
포르노 소설과 프랑스 대혁명
푸드포르노(Food Porno)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로잘린 카워드의 <여성의 욕망>이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로 '시각적인 자극을 극대화한 음식 또는 영상'을 의미한다. 이미지만으로도 침이 넘어간다.
푸드포르노
푸드포르노에서 '포르노'라는 용어는 자연스러운 욕구나 충동을 의미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외설이나 성적인 의미로 비친다. 왜 그럴까. 어떤 믿음이 각인된 걸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 시대에 금지된 베스트셀러를 추적해 본 결과 포르노 소설과 SF, 정치적 비방을 담은 소설을 만나게 된다. 이 세 가지 소설의 공통적 특징은 기존의 이념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세계로의 도약이다.
소설과 포르노그래피는 자본주의를 역행하는 자유사상과 연관이 있다. 지배 권력이 계획하고 조작해놓은 틀에 소설과 포르노그래피가 대항하게 되니, 지배계층 입장에선 당연히 금기시할필요가 있다. 판화가 라이몬디가 체포된 이유도 그가 포르노그래피를 대량으로 찍어 일반인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노동력을 가진 사람들이 포르노그래피에 빠져 능률이 오르지 않자, 다급해진 지배계층이 취한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포르노그래피'에 노골적이며 성적 노출을 내포한 의식을 덧씌우는 일이다. 이 용어는 훗날 노동력을 착취하는데 이용되었고 부르주아들이 '대영제국'의 벽을 쌓는데 얼마간 일조하게 된다. 통제 속에 주어진 최소한의 자유는 포르노의 위치를 더 어두운 곳으로 옮겼으며 이는 불평등으로 이어졌다. 노동계층의 엄격한 관리 감독이 경제를 키웠다는 이유로 아직도 포르노가 그 위치에 존재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포르노그래피 | 베스킨라빈스
다행히 19세기에 들어 포르노그래피의 누명이 슬슬 벗겨졌다. 결과적으로 계몽사상과 함께 프랑스 대혁명의 지적인 기원에 포르노그래피가 있었다.도덕적 감시망에서 안전할 수 없었던 작품과 수많은 이데올로기 때문에 밖으로 밀려났던 작품들은 사실 인간이 근원적으로 가까이해야 할 것들이다.그러나 아직도 포르노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대다. 이런 맹신을 깨기 위해서는 언제든 뒤돌아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아무도 읽지 않은 책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 뉴턴의 <프린피키아>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다. 뉴턴은 어정쩡한 독자층을 좁히기 위해 일부로 어렵게 썼다고 한다.뉴턴의 어려운 책, <프린키피아>는 영국의 재산이지만경쟁 국가프랑스의 과학을 두 세대쯤 앞당기는데 일조했다. 다행히 요약서와 해설서의 힘을 빌어 세상에 전달되었기때문이다. 어려운 작품이라고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 답을 책에서 찾아보자.
걸작은 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흠을 상쇄할 만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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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력이 좋다는 것은 흠을 잘 보완했다는 말이다. 흠이 없다면 설득할 필요가 없다. 저절로 믿게 되기 때문이다. 니체는 묻는다. "비밀스럽고 금지된 힘을 갈구하고 열망했던 마법사와 연금술사, 점성가와 요술쟁이들이 없었다면, 과연 과학이 위대해졌을 것이라고 믿는가?"흔히 과학은 증명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손끝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능력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마법을 이벤트라는 단어와 함께 쓰길 요구하며 때론 쇼라고도 표현한다. 이제 어려운 책, 그래서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 완결하다는 맹신은 그만버리는 게 좋겠다.
고전을 리모델링해드립니다
소크라테스는모두가 사랑하는 사상가다. 그의 이야기는 플라톤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플라톤 외에도 크세노폰의 해석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남긴 유명한 말,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은아이들이 인용할 정도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델포이아폴론 신전 앞에 새겨진 문구라는 설이 강하다. 당연하게 소크라테스와 연결 지었던일이 무색한 순간이다.
고전은매력적이다. 추천 도서 목록에오래 자리 잡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고,지적 가치를 높이거나 이성의 관심을 사기 위한 장식용으로도 그 효과는 폭발적이다.그만큼 고전의 인식이 고급스럽고 격조 있다는 뜻이다.그러나 과연 모든 고전이 그럴까.필요 이상으로 감탄하고 평가한 고전은없는걸까. 공자의 논어를 예로 들면, 지나친 해석이라는 평들이 많다. 이미 감탄할 준비를 충분히 해놓고 해석에 임했다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물론 이 표현도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평가도 결국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때문이다.
논어 | The News
요즘 고전은 위태롭다. 우리가 교과서처럼 믿고 읽는 논어, 논리를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이상 절대적 기준이 아니다.아는 만큼 볼 수 있는 세상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수정되거나 삭제되고 다시 입력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식으로 누가 평가했는지 의심해야 한다. 그래야 맹신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무턱대고 믿지만 말고 자신의 '아는 만큼'을 한 번쯤은검열해보길 바란다.
객관성의 칼날에 상처 입은 인간에 대한 오해
인간은 결정되는 것일까 개조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본성과 양육의 대립을 의미한다. 과거의 분위기는 이렇다. 본성론자 입장에는 나치즘이, 양육론자 입장에는 공산주의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본성을 긍정하면 보수, 양육을 긍정하면 진보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었다.
본성이냐 양육이냐라는 문제는 시대를 거듭나면서도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쌍둥이 실험, 성을 전환한 사람들의 이야기 등 무수한 사례가 있지만 결국 본성과 양육은 경계 또한 선명하지않다. 시몬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을 통해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본성보다 환경의 산물임을 주장했다.
유전자는 씨앗과 같은 것이다. 같은 씨앗이라고 해도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른 식물로 자라듯이 같은 유전자가 같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p.239
Amy Shamblen | Unsplash
세상에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로 길러지는 경우가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역시 환경 즉 양육을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이제 본성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밀턴 다이아몬드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문화, 교육 등이 인간의 성 정체성에 미치는 정도는 유전적 요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본성과 양육은 아직도 시비 중이다.뚜렷하게 무엇이 맞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각각의 사례를 관찰하며 끓임 없이 의심하고 질문해야 한다. 객관성은 없다. 주관성이페르소나를 걸치면 우리는 그것을 객관성이라고 믿는다. 이제부터 객관적이라고 느낄 때마다 어떤 페르소나가 씌워진 것인지 의심해 보시길.
책의 학살, 그 전통의 폭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에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 사람들은 신중하게 책 한 권을 골라 읽지 않고 억지로 한 권을 뒤적거려보고는 쓸모없다고한다는것이다. 이것은 책에 대한 모독일까. 고대에 책을 이단화 하는 현상은 종교적 이유가 컸다. 새로운 왕은 이전 왕조의 장서를 없애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정치적으로 책을 학살하는 행위는 지성의 거세를 의미한다.
인류가 '뒤틀린 목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결점을 적나라하게 인식한다. 자신의 약점을 극복해야 인격이형성된다고 믿는다. 토머스 머튼의 주장과 일치하는 견해다."영혼은 운동선수와 같아서 싸울 가치가 있는 상대가 필요하다. 시련을 겪고, 스스로를 확대하고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그것뿐이다."
위에서도 거론했듯이 이념이나 개념, 도덕, 법 뒤에는 여러 페르소나가 존재한다. 그래서 무엇이 알맹이이고 껍데기인지 판별하려면독서 습관이 중요하다. 책 속에서 지식만 추려 암기하다보면자칫 오만해지기 쉽다. 맥락을 보지 못한다면 종이 몇 장 넘기는 일에 그치고 만다. 그렇게 의심 없이 쌓아둔 창고에서 맹신이라는 괴물이 자라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창고가 가득 채워질수록 생각하기 싫어한다. 생각을 즐겨야성장한다는 것을 모른다. 이제 어떻게 될까. 괴물은 생각을 갉아먹고 사람들은 방향성을 잃는다.주는 대로 믿으라며 폭력을 행사해도 자신을 구하지 않는다.
단 한 권의 책이 길이 될 수 있다. 맹신을 깰 수 있다. 도서관 구석에서 한 번도 사람의 손길을 만나지 못한 책 속에 그 길이 있을 수 있다. 책을 읽는 이유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더 이상 베스트셀러나 진열된 책들의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