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릴 수 없다. 덧칠로 가릴 수도 없다. 그것은 최상을 바라지 않는다. 기다려야 비로소 휘발된다. 끄트머리에서 만난 세상을 무덤덤 바라보는 여유, 작가가 공들인 '슬픔'이라면 최선 하나면 족하다. 곧 도착할 것이다. 당신은 안개가 내려앉은 흐릿한 역에 하차할 것이며, 정면을 응시하느냐 되돌아가느냐에 따라 슬픔의 농도가 정해질 것이다. 우리가 슬픔을 용해하는 방법은 책장을 넘기면서 그 비밀이 밝혀진다.
지긋이 바라보다
슬픔이 감정이라면, 그것의 무대인 비극은 피할 수 없는 불행한 상황을 말한다. 비극은 사람들을 작품 속에 끌어들여 그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고약하다고 폄하하지만 껍데기를 벗기면 새로운 가치와 태도가 정비된다. 그래서 슬픔을 제대로 승화시켜본 사람만이 비극을 즐길 줄 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보다 비극을 진정한 이야기로 보았다. 비극이 인간의 고통을 제대로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현재에 주저앉지 않으려는 확고한 의지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스에서는 시민의 참여가 시작되고 민주주의가 완성된 시기에 비극이 성행했다. 오히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비극의 인기가 시들해졌다.
비극은 사회의 잘 나가는 분위기를 빠르게 감지해 감정의 나침반을 제시한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우리의 비극이 천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조금은 덜어진다. 슬픔은 많은 조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선량한 태도 하나면 충분하다. 같이 울어줄 사람 말이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사람, 슬픔을 가장 즐겁게 그린 작가, 바로 다자이 오사무다. 그의 언어가 슬픔에서 출발한다는 걸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항구는 안개에 자주 가려지기 때문에 빛이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 이제 안개가 덮인 항구에서 빛으로 물든 사람을 만나보자.
같이 울어 줄 사람
다자이 오사무 / 위키디피아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체념과 희망 사이를 오간다. 그들의 목소리는 가냘프지만 결코 끊어지지 않는 생의 끈이 매달려있다.『인간실격』으로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는 암울함과 자기 분열을 작품 속에 고백했다. 불후한 청년기와 가문이 가장 큰 이유다. 11남매 중 열 번째로 태어난 그는 부모의 사랑과 거리가 먼 자식이었다.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이룬 조부와 아버지를 늘 수치로 여겼고, 이 문제는 다른 고민과 충돌하면서 자살로 이어진다. 다섯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생을 마감한 그는 자신을 작품 속에 묻어두고 떠났다.
다자이 오사무의 형제들은 그를 포함해서 4명이 요절한다. 그가 가장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한때는 미치코와 가정을 이루었을 때로『달려라 메로스』와 『쓰가루』라는 작품이 탄생한 시기다.한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다자이의 작품이 모두 사라져도 『쓰가루』하나만 있으면 나머지를 복원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다"라고 말이다. 그 정도로 『쓰가루』의 탁월함을 으뜸으로 꼽았다. 그 시기를 다자이 오사무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이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슬픔을 건너는 법
몰락은 무엇일까. 한때는 정상을 누렸을 거대한 댐이 작은 틈 하나로 무너지듯 한순간에 찾아오는 게 몰락이다. 그렇게 찾아온 몰락은 평안과 자유를 부수고 바닥으로 질주한다. 작품 속 몰락의 원인은 전쟁에서의 패배, 제국의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불행에서 시작된다. 언제나 불행은 찰나에 예고 없이 오고야 만다.
그렇게 시작된 몰락 그리고 슬픔. 여기서 ‘사양 斜陽’은 ‘지는 태양’을 의미한다. 한때 최고의 엘리트였던 귀족을 비유한 '사양',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중일 전쟁, 태평양전쟁이 지나간 시기, 제국을 자랑으로 여겼던 일본의 권위는 땅으로 떨어지고 귀족들은 추락하기 시작한다. 전쟁에서 패배한 남자들은 허망함과 무료함을 이유로 가정을 등한시한다. 모두 쾌락을 좇아 하루를 낭비하고 있다.
『사양』에는 총 10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이 작품들의 특징은 대부분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그녀들은 이름이 없거나 있어도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게 전부다. 그러나 누구보다 그녀들의 목소리는 살아있다. 몰락의 순간, 생의 마지막에도 빛나는 인물들『사양』속의 여성들이다. 그는 작품 속 여성 인물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몇 가지 작품을 시작으로 단서를 찾아보자.
빛으로 환하게
아, 엿보고 싶으면 엿봐라, 우리 식구는 이렇게 아름다우니까. p.17
누구나 암울한 시기라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작품 속 여성들은 쾌활하거나 명랑하다. 겉으로는 속이 없어 보인다.「등롱」의 사끼꼬가 그렇다. 그녀는 사랑하는 미즈노를 위해 수영복을 훔치는데, 자신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한 마디로 잘못된 사랑이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사회 고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비리 고위 공직자의 명예가 갈수록 높아만 가는 일본에서 수영복 한 벌 훔친 일이 무슨 죄가 되는지 되물으며 그녀는 세상을 조롱하고 있다.
그녀의 냉소는 마지막에 절정을 이룬다. 수영복 사건으로 어두웠던 사끼꼬의 가족이 체념하듯 모여 앉아 등롱을 밝히며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작가는 이 하나의 이미지를 독자에게 남기며 진리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사끼꼬의 마지막 말이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답은 이것으로 충분해 보인다. "아아, 엿보고 싶으면 엿봐라, 우리 식구는 이렇게 아름다우니까." 가장 낮고 천한 곳에 불을 밝히는 일은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만큼 그들 삶의 의지는 확고하기에.
침묵으로 사색을
행복은 하룻밤 늦게 온다 p.61
「여학생」은 당시 다자이 오사무가 표절 의심을 받았던 작품이다. 문하생의 일기를 그대로 작품에 담았다는 고발이 있었지만, 여자의 심리를 리얼하게 옮긴 것을 의심한 결과, 소문으로 불거졌다는 평이 강했다. 작품 속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그녀는 십 대 여학생으로 고독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등교를 준비하면서 홀로 말없이 사유의 시간을 보낸다. 그녀는 버스와 전철을 타면서 주위를 낯설게 둘러본다. 시대적 암울함이 묻어나지만 그녀는 역시 우뚝 일어서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
우리가 슬픔 앞에서 보여야 할 자세는 기다림이다. 행복을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은 세상을 원망하다가 급하게 길을 나선다. 그러나 행복은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닌 다가오는 것이다. 그 다가옴을 오롯이 기다려야 맞이할 수 있다. 주인공 여학생은 ‘하룻밤 늦게 찾아오는 행복’을 위해 하루하루에 충실한다. 그녀의 걸음과 언행은 명상과도 같다. 그녀가 스친 거리와 건물은 온통 사색의 미를 향유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침묵을 안고 어떤 공간을 스친다면, 슬픔은 겁을 먹고 달아날 것이다.
풍경을 눈동자에
사람의 눈동자는 풍경을 담을 수 있다 p.106
「눈 오는 밤」은 아주 짧은 작품이다. 그녀는 숙모에게 받은 마른오징어를 임신한 키미꼬 새언니에게 주기 위해 걷다가 눈길에서 그만 잃어버린다. 궁핍한 소설가인 오빠는 체면을 중시하기 때문에 임신한 아내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사는 걸 꺼린다. 당시 일본 남성들의 모습을 폭로하는 묘사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설경을 눈에 담아 새언니에게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눈동자는 풍경을 담을 수 있다.”라고 말한 오빠의 말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나온다. 덴마크의 한 의사가 난파된 배에서 젊은 어부의 시체를 해부했는데 그의 눈동자 망막에 단란하고 아름다운 가족이 어려있었다는 이야기다. 등대지기 일가가 단란한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광경은 그 모습을 깨뜨리지 않으려는 의사의 배려심으로 존중된다. 결국 도움을 청하지 못한 그는 파도 속으로 떨어진다. 누군가의 행복은 누군가의 슬픔이기도 하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은 맞닿아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행복은 그리움이 된다. 우리는 기다림으로써 그리움을 이겨낸다.
사랑으로 혁명을
부디 당신도 당신의 투쟁을 계속해주세요 p.318
표제작「사양」은 10편의 작품을 어우르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패전 후 일본의 실상을 그린 중편 소설로 주인공 카즈꼬를 통해 귀족의 몰락을 엿볼 수 있다. 카즈꼬는 동생 나오지와 일본의 마지막 귀부인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간다. 아버지의 부재를 스스로 채워가면서 어머니와 동생에게 애정을 쏟는 카즈꼬는 정신적 가장 역할을 소화해낸다. 그러나 나약하긴 카즈꼬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소설가 우에하라를 사모하면서 사랑과 혁명을 하나의 선 위에 배치한다.
평화와 무역 그리고 정치의 존재 가치는 여자가 좋은 아이를 낳기 위함에 있다고 주장한 그녀는 모험에 가까운 투쟁을 시작한다. 이것은 낡은 도덕과 맞서는 혁명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사랑하는 우에하라에게 얽매이지 않는다. 더욱이 자신의 아이를 죽은 동생 나오지의 아이라고 소개하고 싶어 한다. 우에하라의 부인을 사랑한 나오지를 위해 그녀가 선택한 방식은 당돌하기까지 하다. 그녀의 언어는 단단한 상식의 벽을 허무는 혁명이었다.
슬픔 뒤 기쁨
슬픔을 건너가는 방법은 의외로 평범하다. 자살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주인공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다. 나약함이 자신을 짓눌러도 그들은 희망이라는 내일로 향한다. 그들은 모두 가진 게 없는 빈약한 사람들이다. 모두 지쳤고 아프다. 그러나 그들에겐 여유가 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여유다. 서로 배려하며 다시 일어서는, 결코 밟을 수 없는 확고한 의지를 새기고 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다. 등롱 하나로 온 가족이 환해질 수도 있고, 세상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두 눈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쌓인 생각들이 그들을 단단하게 세우고 더 큰 내일을 향하게 힘을 모아준다. 혁명은 크게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작은 곳에서 출발한 혁명은 새로운 자아를 탄생시킨다. 10편의 작품들이 모두 그렇지만 유독 네 작품이 눈에 들어와 이렇게 정리를 해본다. 결국 우리는 세상을 향해 발을 내밀 것이며, 그 속에서 다시 슬픔을 기다릴 것이다. 이 일의 중심에 서있던 그녀들이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