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혜경 Mar 17. 2023

어느 독자의 허무맹랑함에 대한 고찰

걷기와 읽기의 혼동을 중심으로


페이지를 넘긴다. 주인공이 떨어뜨린 고민과 생각 중에서 쓸만한 것을 주머니에 넣은 후 먼지와 쓰레기만 남기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꼬깃꼬깃 접힌 것펼친. 점자처럼 오돌토돌 글자가 만져진다. 까끌까끌한 느낌에 괜한 걸 주웠나 후회스러워 망설임 없이 납작하게 누른 후 손가락에 힘을 실어 바느질 구멍으로 밀어낸다. 하마터면 남의 얼룩을 떠안을뻔했다. 혹시 몰라 엄지에 네 손가락을 차례로 비비며 잔재를 털어낸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 깔끔하게 박수를 친다. 그 바람에 페이지 한 장이 또 넘어간다. 무릎 아래로 낯선 한숨과 고독의 부스러기가 폴폴 날린다. 버려진 것들은 모두 떨어졌다. 그 위에 무관심이라는 직인을 찍고 모른 체 밟으면 그만이다.






사람들이 자아를 찾아 순례를 떠날 때 나는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볼과 이마에 닿은 빛이 유난히 눈부시다. 쨍한 날씨가 비극의 한 문장처럼 읽혀 왠지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번엔 문밖으로 발을 내민다. 그림자가 밟히지 않으려고 목을 옆으로 길게 뻗는다. 시키지 않아도 두 발이 저절로 걷는다. 스치듯 지나가는 한 남자와 곧 멀어진다. 페인트가 지워진 횡단보도를 지난다. 깜빡깜빡 초록불이 막 빨간불로 바뀔 때였다. 주변이 태양에 탈색되어 빛으로 물든 사이, 어떤 것은 선명하게 다가오다가 말없이 사라진다. 걷다가 다른 세상에 막 도착한 느낌이다.


운동화는 마법에 걸린 게 틀림없다. 금세 헐거워진 발목 부분이 나 아닌 다른 존재의 방문을 말해준다. 의심을 믿고 싶어 오래 내려다본다. 밤새 공들인 바닷가 모래집처럼 발등은 의문을 품은 채 둥글게 솟아있다. 자신은 걸음의 지붕일 뿐 잘못이 없다며 알파벳 대문자 X를 연상케 하는 끈이 흐트러진 매듭을 흔들었다. 마법은 편리를 위해 순수함을 쫓는다. 그렇다면 의뭉스러운 운동화는 그 부분에 취약하다. 제외하기로 마음먹었다. 와중에도 시키지 않은 걸음이 이어져 또 다른 자아가 느껴질 정도다.


걸으며 생각한다. 알 수는 없지만 아니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한걸음’ 여행이 나쁘지 않다고... 보폭을 모아서 추억과 곱하면 먼 훗날 나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거울을 살 수 다. 꽤 괜찮은 장사라고 생각했다.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다. 이번엔 운동화가 밟고 있는 땅이 보인다. 노크는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오른발 앞꿈치를 세워 동동 두드린다. 여기가 어디죠. 지금 내 마음이 닿은 이곳이... 진실한 답을 기대했는데 동동, 땅에서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붙는 행위만 반복되었다. 저 아래 깊은 곳에서 가느다란 음성이 올라오다 사라진다. 갑자기 문학적인 답을 찾고 싶어졌다.


Photo by Carolyn V / Unsplash


몽환적인

스아아스아아 종이의 목소리, 방금까지 검은 도로에서 낡은 횡단보도를 본 것 같은데 이곳은 흰 바탕에 검은 글자가 수없이 박혀있다. 어떤 글자는 밑줄에 걸터앉아 전선에 앉은 새들이 연상되었다. 그들에게 글이 가리키는 이별은 2만 볼트의 전압만큼 무덤덤해서 눈물이 폭우를 앞세워 난동을 부려도 깃털을 터는 행위 하나로 대부분 사라지는 고통이다. 새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유독 인간에게 치명적인 이유는 흰 바탕에 박힌 검은 글자가 모양 그대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빛이 퍼지듯, 물감이 번지듯 닿는 대상에 따라 의미가 변형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해석의 차이'라고 이해하는데 새들은 관심이 없어 노래를 부르다가도 맥락을 무시한 채 어딘가로 날아갔다. 감정의 물결이 새와 사람을 구분 짓기 위해 둘 사이에서 건너지 못할 강을 이루고 있다.


이미 눈치채고도 남았다. 다만 실망 하나, 길에서 책으로 넘어오면서 그 경계를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다. 물론 공간은 종종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놀이동산의 귀신의 집, 유리의 방 그리고 미로는 착시를 활용하지 않으면 관심을 끌기 어렵다. 즉 어떤 공간은 유인을 위해 눈속임이라는 초대장을 발부한다. 이것은 지팡이 끝으로 같은 곳을 두 번 짚을 수 없도록 누군가의 눈을 멀게 하는 일보다 잔인하지 않아서 놀이가 된다. 가 기억하지 못한 이쪽과 저쪽을 잇는 경계는 나를 책의 놀이 공간으로 초대한 누군가의 눈속임이나 마찬가지다.


주위는 도시처럼 반듯하고 깨끗하다. 이야기가 되지 못한 것들은 이미 스스로 물러난 상태다. 생각해 보니 이상할 일도 아니다. 평소 걷는 걸 좋아하는데 그때마다 스치는 풍경을 자주 책 속의 무대라 상상했었다. 걸었던 길을 뒤돌아보며 만약 지금 서 있는 곳이 책으로 흡수된다면 제목은 무엇이며, 몇 페이지 몇 번째 줄일지 고민하곤 했다. 이를 테면 지금 두 발이 서 있는 좌표를 문학적 텍스트로 환산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몇 가지를 제하면 지나가는 사람과 오토바이는 물론이고 담을 넘는 고양이까지 놓치지 않고 반영하는 편이다. 이 일은 나머지 없이 딱 떨어지는 나눗셈처럼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상황은 책으로 환산이 어려워 뒤죽박죽일 때가 많다. 세상에는 시끄러운 작품보다 한 번도 입을 떼지 못한 플롯들이 더 많기에 '대략' 또는 '어림잡아'라는 단어 뒤에 어울리는 근사치를 얻는 게 즐거움이다.



대충

이곳 주인공 얼굴이 그려진다. 흐릿한 공기와 눅눅한 느낌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목구비는 엉성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지상에 있어도 지하처럼 어두운 마치 천국에서 추방당한 비둘기를 닮았다. 얼마 전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책꽂이로 돌려보낸 책이 있다. 주인공의 은신처, 바로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책이다. 나는 주인공 한탸의 생활방식과 집요함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문학을 존중하는 그가 만약 내 앞에 나타난다면 몇 마디 칭찬을 덧붙이기보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표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의 책사랑은 짝사랑을 닮아서 어떤 말을 건네도 날 기울어진 사람으로 오해할 테니 말이다.


그의 정중한 요구에 조금 덧붙여야 한다면 미리 준비한 메모를 읽어줄 셈이다. 자신의 삶을 함축된 시처럼 압축해 버리는 당신이라는 사람은 겨울에서 봄으로 환승 시 겪게 될 꽃샘추위와 같아서 누군가에겐 재채기를 유도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기념일을 챙길 정도의 참을성을 제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손수건을 챙겨야 할 정도로 찜찜한 사람임에 분명하지만 문학에 대한 존경심가만한다면 그런대로 의미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운 좋게도 지금 내가 서 있는 지점과 한탸의 마지막 모습이 오버랩된다면, 너무 시끄럽다거나 고독하다는 느낌은 본래 따로 존재하지만 당신 덕분에 공생할 수 있어 오늘 일기가 무척 진지해질 것 같다고 전하고 싶다. 역설이 도착할 때마다 나는 도망갈 준비를 했지만 매번 그 자리에 남아 무언가를 쓰곤 했으니까... 그런데 알 수 없는 건, 왜 한탸였을까. 꼭 그 사람이어야 했을까. 범인을 추정할 때 형사들이 즐겨 쓰는 방법 중 하나가 사건을 역으로 추적하는 것이다. 그래, 왔던 길을 되돌아보자.



......느낌이다 - 막 도착한 - 다른 세상에 - 사라진다 - 말 - 없이 - 선명하게 - 어 - 떤 - 것 - 은 - 바뀔  -  -  빨간불로 - 막 - 초록불 - 깜 - 빡 깜빡 - 깜 - 빡 - 지난다 - 페 - 인트가 - 지워 - 진 - 횡 - 단 - 걷는- 다 - 멀어진다 - 한 - 남자와 - - 지나가는 - 스 - 치 - 듯......



그때

떠오른 한 사람. 스치듯 지나쳤는데 생생한 기억. 비좁은 어깨, 바람에 날리는 모자를 아슬아슬 붙잡고 있는 정수리. 허름한 외투가 주름을 통해 궁핍을 재현하지만 빛을 외면하지 않는 두 눈동자가 나름대로 소신 있어 보인다. 남자에겐 일행도, 길을 묻는 사람도 없다. 단지 그는 허전함을 등에 달고 무언가 힘껏 밀었다. 수레에는 한때 깔깔 웃으며 누군가와 아이컨택했을 두꺼운 책들이 가득 실렸다. 총총 박힌 새까만 글들은 이제 별처럼 우수수 떨어질 일만 남았다. 지금은 볼품없는 폐지 신세가 되어 거대한 무게를 기다리지만 그는 알고 있는 눈치다. 의미는 사망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떠돌이 유기견이 남자바지 종아리에 검은 코를 찍으며 촐레촐레 따라간다. 그가 삶에 진심이라는 게 충분히 느껴졌다. 아주 잠시 쳤을 뿐인데 문득 떠오르다니... 나도 살면서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힘껏 밀어본 적이 있었을까... 그림 같다. 문학적 텍스트로의 환산이 너무나도 당-연-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정한다. 표정에 말투를 얹어 성격을 만든다. 목소리가 큰 사람의 말을 차용해 사건을 만들고, 눈에 띄는 사물은 클라이맥스의 상징을 위해 아껴둔다. 만약 문학적 역량이 모자라 상상이 꼬이면, 그때는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전환하고 걷기에 집중하면 된다. 길에서 만난 인연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곧 파편화되므로 오직 찰나의 기쁨에 숭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제 와서 고백하는데, 길과 책의 유사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서로 닮았어도 언제든 목소리 높여 싸울 수 있는 관계다. 단지 거리의 바람이 삶의 페이지를 어떻게 넘기며, 문학의 순수성을 추구하려면 어떤 걸음을 유지해야 하는지 알아가는 게 나는 좋다. 그래서 "존재와 무의 극한까지 갈 것이다." 나는 지금 한탸의 은신처, 백삼십 쪽 열두 번째 줄을 다시 방문해 이 문장을 마음에 필사하는 중이다. 봄날 오래 걷고 싶다.





* Title photo by Kelly Sikkema / Unsplas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