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앉아 있다. 이어폰을 꽂은 채 창밖을 살피는 남자는 잠을 자느라 이곳이 무슨 역인지 놓친 모양이다. 검은 셔츠에 단추를 세 개나 풀어헤쳐 카라가 맘껏 벌어져 있는 그는 귀 뒤로 넘긴 머리가 목선을 타고 검은 셔츠와 이어져 멀리서 봤을 때는 분명 머리가 긴 여자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몇 걸음 다가갔을 뿐인데 남자로 둔갑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그렇다고 무시는 말고.
창밖에서 시선을 뗀 남자가 지그시 눈을 감으니 오십 대 후반의 얼굴만 남았다. 조용히 다가갔다. 이쪽에서 어깨를 톡 치거나 여기 제 자린데요,라고 입을 떼지도 않았는데 그는 눈을 부릅 뜸과 동시에 놀라 옆자리로 이동했다. 만약 이 장면에 음향을 삽입한다면, 악몽에서 깨어날 때의 전형적인 소리. 엌,이 제격이다. 잠시 음소거 영화를 본 것 같아 이 순간을 환불하고 싶었다. 뭔가 느껴졌을까. 에너지 같은 거. 여하튼 좋다. 그런 자세.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거 말이다. 하지만 순서가 틀렸다. 의자에서 엉덩이를 5cm도 안 되게 뗀 후 13B에 털퍼덕 주저앉을 게 아니라 완전히 일-어-서-서 통로로 걸어 나온 후 내가 먼저 들어가 13A에 앉으면 그다음에 13B에 앉아야 맞다.
혹시 잊을까 싶어 몇 가지 덧붙이자면 13A에서 나올 때 몸집만 한 백팩도 함께 통로로 나와야 하며, 사람이 편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통로에서도 한 걸음 뒤로 빠져주면 좋다. 그의 백팩은 희한하게도 지퍼가 열린 틈으로 손잡이가 우스꽝스러운 우산과 테두리가 낡아서 대나무살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본인 머리통만 한 종이부채가 반쯤 나와 있었다. 그래서 13B에 백팩을 두고 본인 혼자 통로로 나왔다 해도 그것을 좋은 모양으로 내려놓지 않으면, 우산 손잡이가 들어가는 사람의 소매나 가방 끈을 붙잡을 수도 있고 대나무살 끝부분에 팔과 손이 긁힐 수 있다. 이런 일은 미리 조심하는 게 좋다. 남자가 어디까지 가는지 알 수 없지만 한동안 같은 방향을 보고 나란히 앉아 있어야 하는 관계라서 얼굴을 붉히거나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팔꿈치를 옮기는 일마저 부담으로 작용할 테고, 행여 상대방 발밑에 물건이라도 떨어지면 주워달라는 부탁을 시도도 못한 채 포기하게된다. 무리를 해서라도 처음부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순서를 따지는 게 좋겠으나 각자 순간의 판단에 맡기는 일이라 꿍짝이 맞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13B로 쓰윽 이동한 남자는 덩치도 꽤 있는 데다 백팩까지 안고 있어 좁은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려니 망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산 손잡이와 부채도 거슬리지만 이럴 때가 제일 난감하다. 방향을 어디에 두고 들어가야 좋은지 말이다. 남자에게 등을 보이자니 앉아있는 그의 얼굴 위치에 엉덩이가 지나갈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반대로 돌린다고 더 좋은 상황이 연출되는 것도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모르는 인간과 표정을 공유해야 하는 어색한 순간이 벌어진다. 이 자세는 행여 발이라도 꼬여 앞으로 쓰러진다면 의도치 않게 덮칠 수도 있다. 젠장. 통로 뒤로 사람들이 기다리고 서 있어서 저기 죄송한데 좀 나와주실래요,라고 말할 시간도 없다. 이런 상황인 이상 빨리 들어가는 게 최선이다.
먼저 선반에 캐리어를 올린 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배를 최대한 홀쭉하게 집어넣은 후 13A를 향해 들어간다. 방향에 대한 고민을 한 결과 엉덩이는 남자 쪽으로 그러나 상체만은 반쯤 남자를 향해 주시하면서 이중적인 포즈를 취하며 작아진 옷을 힘겹게 입는 것처럼 한발 한발 들어간다. 자세히 보니 남자도 나와 같은 포즈로 배를 홀쭉하게 만들었는지 귀로 넘긴 머리의 높이가 올라가면서 앉은키가 조금 위로 솟았다. 다행히 백팩과 함께 우산 손잡이와 날카로운 부채의 끄트머리도 남자 가슴 쪽으로 기울어졌고 위치가 높아져 나를 닿거나 방해하진 않았다. 펄썩, 앉고 보니 그제야 남자의 뱃속으로 바람이 들어갔고 앉은키가 제대로 돌아왔다.
난 창가 좌석을 선호한다. 비행기를 탈 때도 그렇고 버스나 기차도 마찬가지다. 몸이 흔들릴 때 바깥의 풍경을 밀착해서 바라보는 게 무척 낭만적이라고 믿고 있다. KTX에서 운 좋게 충전을 할 수 있는 usb 단자를 만날 수도 있고 팔 하나를 창가에 올릴 수도 있다. 그림 같이. 졸음이 밀려와도 고개를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돌리면 보는 사람도 거북하지 않고 옆사람의 어깨를 실수로 빌리지 않아도 된다. 도착한 역이 어디인지 금세 알 수 있고 내리고 타는 사람들의 모습을 세밀하게 감상할 수도 있다
13B가 좋은 점은 통로라는 점 하나다. 화장실을 갈 때와 내릴 때 편하다. 참, 짐을 올리거나 꺼낼 때도 좋다. 가끔 지나가는 역무원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고 통로의 처음과 끝을 시야를 가리지 않고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좀 한심하게 보이겠지만 팔 하나를 바깥으로 편하게 폈다 구부렸다 스트레칭할 수도 있다. 발 하나를 바깥으로 뺄 수도 있지만 여자들은 그런 걸 싫어하므로 이 부분은 남자에게만 해당될 것 같다. 이외에도 많겠지만 앞에 열거한 것과 비슷한 정도의 장점이라 더 이상 나열하는 건 낭비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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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거면 진작에 했어야지. 무슨 생각인지 13B 남자는 굳이 백팩에서 우산과 부채를 꺼내 앞 좌석 등받이에 붙어있는 그물망에 꽂았다. 자세히 보니 오리주둥이를 닮은우산 손잡이와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챗살 하나가 나를 향하고 있다. 안전거리는 충분했지만 상당히 거슬린다. 주사를 맞기 위해 제일 앞에 서있는 아이 같았다. 오리주둥이가 뭐라 불평하는 것 같고 왠지 비수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할 수 없이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 풍경이 뒤로 미끄러지는 걸 오래 바라봤다. 가끔 풍경이 어두워질 때마다 창에 비친 남자의 두리뭉실한 머리와 상체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내릴 때까지.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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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눈질한 결과. 그는 자유롭게 오른발을 바깥으로 뻗었으며 바보처럼 팔을 구부렸다가 폈다. 화장실을 자주 왔다 갔다 했으며 기차 연결통로에서 통화를 오래 했다. 무릎에 있는 백팩을 선반에 올렸다가 다시 무릎에 내린 후 두 팔로 안았으며 성가신 우산과 부채를 그물망에서 꺼내 다시 백팩 지퍼를 열고 꽂았다. 엉덩이를 조금 들썩이며 창밖을 보는 듯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13A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거다. 남자는 어느 순간 엉덩이를 앞으로 빼 앉더니 백팩과 한 덩어리가 되어 아주 쿨하게 통로 끝으로 나갔다. 기차에서 내린 그가 백팩을 메는 동안 오리주둥이를 닮은 우산 손잡이와 부채가 심하게 기울어졌다. 기차가 슬슬 움직이며 창밖의 남자가 작아졌다. 나는 무의식 중에 손을 흔들다가 순간 당황해서 창의 얼룩을 문질렀다. 기차가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창에 비친 얼굴에 길게 손자국이 생겼다.
조용히 13B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산만하다고 흉봤던 남자의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오른발을 통로 쪽으로 살-짝 빼고 오른팔을 살-짝 구부렸다가 폈다. 선반에 올린 캐리어를 올려다본 후 웃음을 참을 수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부끄러워 눈을 지그시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