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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혜경 Sep 24. 2022

끄트머리

낯선 곳에 도착하다




문을 열었다. 방 안 가득 묵은 냄새가 얼굴을 감쌌다. 밀폐된 분위기를 하나 둘 내쫓으며 발 하나를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였다. 서둘러 도망가는 눅눅함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짐을 풀었다. 캐리어에 가득 담긴 물건이 모두 껍데기 같아서 혼자 부끄러웠다. 애써 그 안에서 자랑을 찾는다면 다섯 권의 소설과 두 권의 시집 그리고 머리빗과 노트북이 전부였다.



안녕, 이런 여자사람인간은 처음이야!



옷걸이에 원피스를 걸친 후 벽을 빙 둘러 살폈다. 옷을 걸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우선 의자 등받이에 걸기로 했다. 벽에 못 하나 없다니. 이해할 수 없지만 벽의 밋밋한 고집을 그대로 내버려 뒀다. 다시 벽을 빙 돌아보니 가슴에 구멍을 숭숭 뚫는 못질은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옷 한 장 걸어두는 일로 상처가 생긴다면 그 일은 적극 피해야 한다는 주의가 마음 깊숙이 용솟음쳤다. 이상하게도.


선반을 열었다. 반갑게도 라면이 있다. 누군가 하나를 먹고 네 개를 남겨두었다. 인적이 드문 공간에서 넉넉한 유통기한이라니 하마터면 선반 안으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할뻔했다. 라면 봉지 뒤로 선반 깊숙이 벌 한 마리가 누워있다. 머리와 몸통이 온통 까만 벌은 누워서도 더듬이만큼은 반듯하게 V자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이라면 웬만한 일로 눕지 않을 텐데 무슨 일일까. 그 작은 공간에서 자신의 수분을 날리며 말라비틀어졌을 사연이 궁금했다. 건조한 죽음이 무척 가벼워 보여 훅 불어보았다. 날아갈 것처럼 잠시 붕 떴다가 그 자리에 다시 누웠다. 휴지에 물을 묻혀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나머지 손이 투명한 날개를 잡고 창으로 가 후, 불었다. 그대로 떨어져 땅의 장례를 받아라. 그것이 자연의 뺄셈이니.


물을 틀었다. 정상이다. 어머머, 이 시대에 물이 안 나올 리가 없잖아. 괜한 걱정을 한 나 자신이 우스워 두 손을 깨끗이 씻었다. 주기적으로 바보가 되는 내가 놀라웠다. 물자국이 선명한 컵들을 설거지 통에 모두 넣고 물을 틀었다. 몇 방울의 물이 튀어 셔츠를 적셨다. 거품이 사라질 때까지 튀는 물방울을 수용하며 오래 싱크대 앞에 머물렀다. 컵에 맺힌 동그란 물방울을 보니 이 공간의 주인이 된 것처럼 뿌듯했다.



창밖에 그림 한 장



방충망 밖으로 푸른 하늘이 구름을 밀고 있다. 그 앞으로 넓은 잎사귀들이 하늘하늘 인사한다. 햇빛에 자신의 색깔을 양보했는지 몇 장의 잎은 하얗게 들떠 있다. 거미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더 이상 체구를 키우지 않는 이름 모를 식물에게 마음속으로 가볍게 댓글을 남겼다. 이 마을은 욕심쟁이가 추방 대상이군요, 잊지 않을게요. 모눈종이 눈금처럼 촘촘한 구멍 사이로 바람이 줄지어 불어왔다.






봄부터 계획한 일이 가을 문턱에 들어서면서 실행되었다. 시간과 공간에서 멀어지기, 사람과 수다에서 멀어지기, 바로 진도에 머무는 일이다. 교수님이 마련한 시에그린시화박물관에서 입주작가로 지내게 되었는데 사실 여름 내내 상상만 했을 뿐 덜컥 내려오긴 그림의 떡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은 유리를 닮았나 보다. 깨뜨리고 보니 어느새 바닷가였고 파도 위로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그동안 켜켜이 쌓아온 고집과 말도 안 되는 오해들을 잘게 부순 채 말이다. 5시간 넘게 운전하면서 먹먹해진 다리는 낯선 공간에 들어서면서 평행을 이룰 수 있었다. 오늘 밤은 잠투정을 오래 할 것 같다. 내가 닿은 끄트머리가 곧 떨어질 이슬처럼 아슬아슬하다.

 


끄트머리 어딘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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