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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혜경 Oct 03. 2022

곧 민간인

군인이 자랑입니다만




마을 사람 다 됐다. 다행히 낮에 돌아다니지 않아서 피부가 검게 그을리거나 머리카락이 푸석푸석하지는 않지만, 이젠 제법 아는 사람도 많고 김치도 잘 받아먹는다. 누가 어떤 사람을 흉보면 그 대상이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고 맞장구도 칠 줄 안다. 어르신들이 모르는 일을 내가 먼저 알 때도 많다. 누구를 어느 논바닥에서 봤다든지 어떤 어르신이 엊그제 술에 취하셨는지 등등 말이다. 그럴 때면 "고 냥반이 큰일이네 큰일, 징허게 술주정뱅이여. 자석덜 걱정 허니 전화혀야겠고마." 내가 이렇게 골목 사정을 잘 아는 이유는 내가 머무는 숙소가 문만 열면 바깥이 훤히 보이는 원룸 형태이라 그렇다. 현관문 한 장으로 안과 바깥이 구분되는 구조라 노트북을 하고 있어도 이어폰을 꽂지 않는 한, 속도를 줄이며 차 한 대가 지나가도 어느 방향으로 사라지는지 파악이 된다.




골목 입구로 들어가면



앞집 마당에서 빨랫줄 하나도 이미 점령했다. 첫날 잇몸을 드러내며 컹컹 짖던 누렁이도 골목에서 만나면 꼬리를 흔들며 인사한다. 보건소 직원이 화요일과 목요일마다 마을회관에 방문해 치매 스트레칭을 하는 것도 알고 있으며, 어느 어르신이 졸지 않고 끝까지 잘 따라 하는지도 알고 있다. 하하. 친구랑 통화하며 이런저런 얘길 했더니 그 외진 섬에서 구석구석 다 파악하고 있다면 지금 군인 신분이나 마찬가지라며, 여기서 벗어나야 비로소 전역이라고 한다. 호호. 시간 맞춰 따박따박 밥 먹고 하루 종일 앉아서 글 쓰고(신기하게 군대 가면 글을 엄청 쓴다고 한다. 암기까지) 정해진 시간에 잠들고, 일상에 디테일이 없다는 점도 군대랑 똑같다나. 참, 와이파이도 안 된다. 흐흐. 대신 핫스팟 엄청 달달하게 파먹고 있다.

 


단결!
입대했어요


생각해보니 군대 맞다. 나쁘지 않다. 이등병에서 출발해 5일마다 진급했다고 계산하면 지금은 상병 언저리 정도 될 것 같다. 입대 전에 여러 가지 준비로 고민하며 정신훈련받았으니 훈련병을 수료한 것도 맞다. 그리고 진도로 자대 배치받았으니, 이곳이 내 부대 맞다. 건빵만 없지 손만 뻗으면 PX 같은 하나로마트가 30분 거리에 즐비해 부지런하면 부식도 자주 먹을 수 있다.      


젊은 여자가 없다는 점도 군대랑 똑같다.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젊은 남자는 많이 봤다. 동남아에서 넘어온 구릿빛 이십 대 청년들도 많지만 젊은 여자는 구경하기 힘들다. 챙 넓은 모자가 얼굴 절반 이상을 가려 젊은 여자로 본 적도 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영락없이 어르신이다. 아무튼 아가씨가 귀한 곳이다. 그렇다 보니 나보고 아가씨라고 부르는 어르신도 있었다. 비교 대상이 없으니 충분히 이해한다. 히히. 다시 생각해봐도 좋은 곳이다. 이왕 시작한 거 우리 부대 자랑 좀 해보자. 나중에 이 글이 인기가 있으면 홍보라도 되게.

    

우리 부대는 깊은 밤 또는 새벽에 진돗개 발령이 내려도 겁나지 않다. 길바닥에서 다리를 벌리고 늘어지게 잠자는 강아지마저도 죄다 진도개라 용맹 하나는 자부한다. 진도가 이순신의 무대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으니 이 부대가 어마 무시한 바닷가 사람이라는 설명은 오히려 자랑 축에도 안 낀다. 우리 부대 평균 연령은 요 근래 입대한 나를 포함해 여든 중반이 넘는다. 아흔을 넘긴 노인이 통을 메고 대파밭으로 가 약을 치는데, 노장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 부대에 오면 즉시 볼 수 있다.     


 

장화는 생명이다!



이곳은 남쪽 끝 바다를 상대하니 두꺼운 군복 말고 물 빠짐이 쉬운 몸빼를 자주 입는다. 군화 대신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유사시가 아니라 늘 호미라는 무기를 장착한다. 남자들은 이른 아침부터 매연을 풍기며 털털털 털, 트랙터를 타고 벼 사이를 달리며 국민의 먹거리를 지킨다. 그들에게는 베레모나 딱딱한 철모가 보급되지 않아서 수건을 삼각으로 두르거나 빨간 민방위 모자가 전부다. 작대기 개수로 계급을 과시하거나 별과 무궁화로 위협하지 않는 게 우리 부대의 가장 큰 자랑이다.      



바퀴 좀 봐, 그러니 까불지 않도록!



아침 8시부터 마을 이장님이 세 시간 간격으로 안내 방송을 한다. 호미를 들고 즉시 바다로 출동해라, 마스크를 반드시 챙겨라, 또는 내일은 아무개 씨 벼를 벨 것이다, 등등 귀를 쫑긋 세우지 않으면 분위기 파악이 안 되기 때문에 낮에는 창문을 활짝 열고 지령을 잘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수명을 다한 관절을 끌고 골목골목에서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면, 그 팀은 호미나 괭이 부대로 명명된다. 그들의 구호는 침묵으로 모아져 오늘 죽어도 원이 없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군 복무 중 딴짓은 금물인 데다 자랑을 더 하면 팔불출이 될 것 같아 이 정도로 마쳐야겠다. 나는 곧 전역할 것이고 흐트러진 민간인 모습으로 피곤하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려져도 남자들 사이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과장되게 군대 자랑을 할 것 같다. 그때 말이야, 뻘이 얼굴을 덮쳐도 호미로 바지락을 캤다니까. 그래서 말이야...... 말이야......


아무튼 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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