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혜경 Mar 04. 2020

저기요, 저는 아닌데요

'모든'이 사라지는 날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의 늪을 드나드는 우리는 정작 생각의 깊이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관심이 없다. 누구나 물 흐르듯 자유롭게 생각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마주 보는 일에는 언제나 귀찮아한다. 생각은 문제가 감지되고부터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것은 자신의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생각은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한 행동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저장된 기억들을 조합해서 옳고 그름의 기준점을 찾고 행동의 방향을 정하는 과정이다. 문제를 만난 전두엽이 정서와 지적 자산을 조율을 하는 것이 생각이다. 생각이 넓고 깊다는 것은 전두엽의 내용이 알차다는 것을 말하며, 생각이 없다는 것은 그 반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상대적이고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것이 생각이다.


  생각을 시작하면 개인의 지적 수준에 근거한 논리가 작동한다. 그리고 개인의 환경과 배경지식, 이념 등 개성에 따라 여러 색으로 채색된다. 바깥의 논리가 사회적으로 객관성을 띠기 마련이지만 개인의 생각과 버무려지면 신념이나 취향, 가치관에 변화를 주기 때문에 생각을 하면서 자신만의 무늬가 만들어진다. 이때 한 사람의 고유한 논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종종 고집이라고 말한다. 소통할 때 주의할 점은 각자의 논리를 존중하며 합의점을 찾는 것이다. 상대의 논리를 내 안에서 동의하는 것이 소통이다. 이때 서로가 꺼낸 장애물을 건드리지 않고 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에서 공감하면 성공한 소통이 된다. 



  

  우리는 카페나 공공장소에서 여러 종류의 소통 과정을 발견한다. 그 대화가 은연중 테이블을 넘어오는 순간 누구나 그 대화에 침묵으로 참여하게 된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이제부터 그 장애물이 어디에서 생겼는지 알아보자. 두 사람의 대화는 지금 충돌을 고 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의리에 손상이 갈 정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대화 내용은 이렇다.




모든 사람은 무조건 하루 7시간 이상을 자야 해!

vs

아니야, 5시간만 자도 충분해!



헬스조선 DB


  7시간 수면을 고집하는 사람은 하루 7~8 시간을 자야 심혈관질환 등 각종 질환에 의한 사망 위험이 낮다는 국제 연구 결과를 예로 들었다. 협심증이나 심근경색 등 심혈관질환 발생 위험이 수면 7시간과 관련이 있다는 논리다.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자기는 죽었다 깨어나도 5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반박한다. 자신의 가족 대대로 그렇게 잠이 적은 편이며, 굳이 안 자도 되는 7시간을 채울 필요는 없다며, 수면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며 집안 내력을 예로 들었다.


  외부의 논리를 가져와  대화하는 사람은 자칫 단단한 콘크리트 감옥에 갇힐 수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경험을 고집한 사람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주장한 사람은 더 좁고 깊은 구덩이에 빠질 수 있다. 7시간 이상의 수면이 좋다는 연구도, 7시간 수면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연구도 현재는 존재하기 때문에 외부의 논리는 계속 상반된 길을 갈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문제와 같아 시비가 많이 생긴다. 물론 닭과 달걀의 문제도 새로운 답이 존재하는 이 시점이지만 말이다.


  외부의 논리를 즐기는 사람들이 간단히 쓰고 버리는 것이 삼단논법이다. 삼단논법은 미리 알려진 두 판단에서 그것들과는 다른 하나의 새로운 판단으로 이끄는 추론 방법이다. 두 개의 명제를 전제로 결론을 내는 대표적인 간접 추론 형식으로 연역 추론이라고도 한다.

  연역법은 'A가 B이고, B가 C 이면 A는 C이다'의 과정을 거치면서 결과에 도달하는 방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 논법으로 '모든'에 해당하는 거대 명제라면 사용하는데 무리가 없다. 그러나 정작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이 방식에  논리라는 표현을 아꼈던 사상가라는 점에서 주의 있게 살펴야 할 부분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나는 사람이다
나는 죽는다


  간결하고 명확해 보이는 삼단논법에 7시간 수면을 주장한 사람의 이야기를 대입해 보자.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면 껄끄러움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법에 이 문제를 대입하는 것 자체가 모순처럼 보이지만, 직감했듯이 우리 주위에는 모순을 담고 있는 대화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대화방식 그대로 재연하면 어쩔 수 없다.


모든 사람은 7시간 수면해야 한다
나는 사람이다
나는 7시간 수면해야 한다


  이것을 주장한 사람이 살피지 못한 부분은 '모든'에 있다. 단정적으로 生과 死처럼 두 개의 결과로 나뉘지 않는 이상 서술된 내용에 '모든'이라는 단어는 맞지 않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시도 과학이 발달하고 영원한 삶이 가능하다면 머지않아 틀린 답이 될 것이다.

허스크 밋나븐

  두 사람의 대화 충돌은 '7시간 수면'에 반기를 든 사람이 존재한다는 데 있다. 이미 '모든'이라는 공식에 금이 간 셈이다. 그래서 논법의 취지와 어울리지 않다. 그렇다면 '모든'은 단 한 건의 예외 때문에 '대부분' 또는 '거의 모든'수정되어야 다.


  이제 7시간 수면을 주장한 사람이 살피지 못한 부분이 드러났다. 자신이 '모든 사람의 대표성을 띠는' 존재로 단정한 점이다.  한 명일 지라도 예외자의 출연으로 논법은 수정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7시간 수면해야 한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이다
나는 7시간 수면해야 한다

'나는 7시간 수면해야 한다'라는 결론은 도출했지만 역시 대전제의 출발에서 소전제로 이동했을 때 의미가 모호해지고 논리가 어긋난다. 무리한 대입이 오류를 낳은 셈이다. 대전제와 소전제의 투명성이 절실한 순간이다.



  그렇다면 5시간 수면을 고집한 사람의 매너리즘은 옳은 걸까? 경험은 자신을 살림하는데 필요한 요소일 뿐, 모든 사람을 하나로 움직이는 데 사용되는 근삿값은 아니다.  경험이 주장이나 고집, 신념으로 작용해야지 논리로 무장하면 깨지기 쉽다. 경험을 주장한 사람이 살피지 못한 부분은 자신의 경험으로 기존의 '모든'을 깨고 새로운 '모든'이 되려는 데 있다. 그러나 '모든'에 포함되는 가치는 생각만큼 폭이 넓지 않다. 누군가가 "모든"이라고 말하는 순간, 맨 뒤에서 "저는 아닌데요!"라고 반대 의견이 달려오기 마련이다. '모든' 신이 좋은 것도 아니고 '모든' 산이 높은 것도 아니며, '모든' 여자가 예뻐야 한다거나 '모든'남자가 강하다는 모순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모든'이 모든 이라는 것도 믿을 수 없다.






  우리는 매 순간 어긋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일은 옆 테이블을 넘어 지하철이나 영화관 심지어 법정과 국회에서도 포착된다. 생각의 깊이를 따지다가 여기까지 왔다. 생각은 자신이 어떤 삽으로 어느 방향을 향해 어떤 깊이와 폭으로 파느냐에 따라 자신의 논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이다. 논리란, 생각이 갖춰야 할 법칙이다. 생각이 잘 갖춰지기 위해서는 안과 밖의 지식과 지혜를 적절하게 겸비해야 한다.


  우리의 삶과 생각은 7시간과 5시간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 속에 더 다양한 시간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각은 단순할 필요도, 복잡할 필요도 있다. 어느 것 하나 고정된 것이 없다는 뜻이다. 지금은 우리가 얼마나 단정적으로 살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할 시기이다.


 

  나는 지구 상에 존재하는 '절대로', '모든'이 지워지길 희망한다. 단 한 명의 'NO'가 어딘가에서 손을 높이 들고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라고 하면 기존의 방식을 허물고 다시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지구 상의 'NO'는 주위를 살펴야 한다. 자신의 'NO'가 'NO'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안과 밖을 살피며 설명해야 한다.




이때 사용될 그들의 언어가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울지,


벌써부터 옆 테이블의 소란스러움이


나를 떨리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은유와 상징의 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