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행복론
얼마 전 남편과 신점을 보러 갔었다.
이때에 태어나 이런 생김새를 가진자는 대체로 이러한 운명을 타고난다는 사주팔자나 명리학, 관상은 빅데이터나 통계에 가깝지만 신점은 점을 보는 단 한명의 인사이트에 온전히 기대는 것이다. 신뢰의 여부와는 조금 별개로 나는 오늘의 운세나 별자리점, 같은 걸 보는 걸 좋아하고 재미있어 한다. 물론 신점을 보고 온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으며 그것도 재미있겠다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인터넷에서,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점들과는 다르게 신점은 누군가의 소개의 소개를 통해 개인적으로 예약을 잡고 가야하는 시스템이 대부분이라 한번도 시도해 본 적은 없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할만큼 흥미로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좀 달랐다. 지인에게서 용한 무당을 소개받은 남편이 알아서 예약을 했고, 복채를 준비했고, 나는 그저 옆에서 그 흥미로운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관람권을 얻었다. 내가 귀찮고 번거로워했던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니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남편도 직접적으로 무당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고, 우리는 둘 다 약간의 설레임과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알려준 신당으로 찾아갔다. 그녀는 주소마저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어느어느 초등학교를 찾아 오면 보일 것이다' 라는 식으로 신당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주소를 알려주는 방식마저도 무당같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대로 어느 어느 초등학교 앞에 가니 신당이 보였다. 아주 화려한 간판 옆으로 펄럭이는 오방기가 달려 있었다. 다소 허름하고도 스산한 빌라 1층이었다. 소설 속에 묘사된 것 같은 무당집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그 바로 옆에 비슷한 간판에 이름만 다른 신당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은 조금 실망스러웠지만(여기서만 판다는 뭔가를 사러왔는데 가보니 비슷한 물건이 차고 넘치는 쇼핑몰에 들어간 느낌이랄까?) 마침 부슬비까지 내리는 어두침침한 날씨는 우리의 기대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반층 정도의 계단을 올라 가는데 누군가 자기보다 손 아래사람에게 잔소리를 하는 듯한, 혹은 푸념을 하는 듯한 쉰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들으면 남자 목소리 같기도 하고, 어떻게 들으면 여자 목소리처럼도 들렸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손님도 하도 없고.......(웅얼웅얼).....그런데 니가! ....(웅얼) 되겠니?"
개인적인 대화인 것 같아서 끼어드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남편은 "계세요? 3시에 예약을 했는데요..."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며 들어갔다. 황급히 두사람의 이야기를 종료되고 "들어와. 들어와."라며 짙은 화장을 한 중년의 아줌마가 손짓했다. 투덜대던 쉰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나는 신을 벗고 들어가며 빠르게 집안을 훑었다. 들어가자마자 끈적해 보이는 낡은 주방이 붙여 있었고, 작은 방 두칸 중 한 칸에는 입구에 등을지고 있는 젊은 여자가 TV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낯선 남녀의 등장에도 아무 관심이 없는 듯 무심하게 구부정한 등만을 내밀고 있었다. 무당 아줌마는 우리를 남은 방 한칸으로 안내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던 '신당'의 모습이었다. 붉고 어두운 조명에 수많은 초들, 제삿상같은 상차림과 탱화들, 그리고 작은 상. 우리는 그 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날이 후텁지근했지만 그녀는 방문을 닫았다.
"그래. 뭐가 궁금해."
그녀가 갑자기 웃고 있던 표정을 싹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날의 주인공이 아닌 관람객이었기에 옆에서 남편이 무당아줌마와 주고 받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로 했는데, 그 질문이 참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걸 왜 묻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주팔자라면 어느 해, 어느 월, 어느 날, 거기에 어느 시간에 태어났는지까지 물어볼 수 있다. 무엇이 궁금하냐는 질문도 할 수 있다. 직장운이냐, 연애운이냐, 시험운이냐하는. 그런데 내가 아는 한 신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신당에 들어서는 순간 '너, 이게 고민이라 왔구나!'라며 벼락처럼 소리를 쳐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뭐가 궁금해서 왔냐니. 그걸 맞추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애써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감추려했지만 남편은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했는지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요 근래 자주 듣던, 그가 매일 밤 고민하던 익숙한 이야기였다. 둘이 나누던 익숙한 고민을 처음 만나는 제 3자에게 털어놓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는 그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가족으로서 그 자리에 있는 동시에 내가 아는 보편적인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나 기묘한 방법으로 내밀한 고민을 나누는 두 사람 사이에 투명인간이 되어 제 3자의 입장으로 그들을 관찰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했던가?
남편은 생각보다 어색해하며 쭈뼛쭈뼛 이야기를 풀어냈고 그 앞뒤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던 내가 듣기엔 많은 부분이 생략됐거나 솔직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콩떡같이 얘기해도 신이 씌인 무당이라면 찰떡같이 알아듣겠지.
드디어 그녀가 입을 뗐다. 뭐라 뭐라 조언도 하고, 충고도 하고, 무당답게 뭐뭐뭐가 그렇지?라며 확신하듯 말하기도 했다. 아니라고 하면 그건 뭐뭐뭐 해서 그런거야. 라고 빠져나갔다. 나의 실망감은 시간이 지날 수록 짙어졌다. 무엇하나 정확히 알고 있는 게 없고, 정확히 맞추는 것도 없었다. 내가 여기서 거짓말을 잔뜩 늘어놓아도 모를 것 같았다. 그녀는 나에게도 충고의 몇마디를 거들었지만 내가 볼 땐 뭘 알고 떠드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저 '네. 네. 알겠습니다.'라고만 해주었다.
당연히 100% 예의상!
굳이 거기서 그녀와 이게 맞네 틀리네, 너는 이것도 아네 모르네 언쟁을 벌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빨리 이 신당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 무당이 그냥 이름뿐인 사기꾼이라는 건 너무 확실하다. 빨리 나가서 남편과 함께 "이것도 틀렸고, 저것도 못 맞췄고, 그 얘길 할땐 무슨 딴소리냐 싶어서 너무 웃고싶었어."라고 수다를 떨고 싶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신당을 나와 그녀가 우리의 얘기를 들을 수 없을 정도의 거리가 되었을 때 그에게 "어땠어?"라고 물었다. 당연히 전부다 틀렸지! 이게 뭐야, 기대했는데!라고 이야기할 줄 알았던 남편은 "어느 정도 맞는 거 같아. 나는 답을 얻은 거 같아."라고 대답했다. 줄줄이 다 틀리던 무당의 얘기보다도 충격적이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너무 놀라서 대체 어디가?라고 물었다.
우리의 차이는 여기에 있었다.
그는 문제가 있고, 그 문제의 답을 스스로 찾지 못했다. 혹은 찾았지만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누군가 정해주길 바랬다. 그리고 그 무당은 그에게 어떻게 하라는 행동 강령을 내려주었다.
나는 그의 문제도 알고 그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인생이기 때문에 내가 확실히 이렇게 하라!는 답을 줄 순 없었다. 그건 나의 답일 수는 있지만 그의 답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답은 그가 찾고 행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그 신당에서 무당이 하는 이야기 중 답안이 아닌 팩트체크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이 두루뭉술하고 누구나 때려맞출 수 있는 수준의 것이기 때문에 '틀렸다'고 판단한 반면, 남편은 그 두루뭉술함에서 맞는 부분에 집중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
집에 감나무 있지?
-아니요?
있었으면 죽었어.
-아, 그렇군요.
앞으로 감나무 심지마.
나는 감나무가 없는데 있다고 한것이 틀렸으므로 앞으로 감나무를 심지 말아야 한다는 도출자체가 틀렸다고 본 반면, 남편은 감나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맞추지 못했지만 앞으로 감나무를 심으면 안된다는 답을 얻었으니 의미가 있었다고 보는 식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번째 신점 탐험은 기대에 못미치며 (나에겐) 약간은 시시하게 끝났다.
점을 보고 돌아와 남편은 어느 정도 본인의 고민의 방향에 대한 결정이 선것 같았다. 누군가 절대적인 인물이 도와준 한 마디가 그에게 인생의 통제권을 다시 가져다 준 듯 보였다. 자기가 가진 통제권을 잠시 위탁하여 다시 통제권을 찾다니. 인생의 해법이라는 건 정말 다양한 경로로 풀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반대로 나는 왜 그녀에게서 단 하나의 그럴싸한 답을 얻지 못했을까?
일단 나는 맨 처음 그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녀에 대한 절대적인 환상이 깨져버렸다. 누군가에게 푸념(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음)을 늘어놓고 있는 신의 대리인이라니. 무엇이 잘 되지 않음을, 잘 풀리지 않음을 한탄하는 무당이 모시는 신에게 나의 문제를 위탁할 수는 없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인간적인 불만이나 문제가 없어야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인간에게 내 인생의 통제권을 위임하려면 점을 보는 동안 그녀는 팩트체크가 될만한 뭔가 하나는 맞췄어야했다(그녀에게 신이 빙의해 있음을 증명해야했다).
어떤 결정의 결과가 50:50으로 비슷한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남편에게는 '결정'자체가 더 무거운 것이고, 오히려 그 결정에 의한 결과에 대한 책임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무당이 사실을 잘 맞추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면, 나에겐 누가 결정의 권한을 갖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나의 권한을 대리할 수 있는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는지 판단하고 평가하는데 집중했었던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삶에 대한 통제와 방향에 대한 선택권을 가질 때 행복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신점을 보며 느꼈던 건 통제와 방향선택에 대한 방점은 모두가 다르게 찍혀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선택의 자유 그 자체를 보장 받는 것이 행복하다 생각하고 누군가는 그보다는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에 집중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반대의 입장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