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뛰는 시작을 자축하며
인생의 전환점은 때때로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 찾아온다. 그 순간은 졸업, 취직, 결혼이나 출산,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처럼 명백하게 드러나는 사건으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변화들의 합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내 인생 마흔 남짓. 나에게도 커다란 인생의 전환점이 여러 번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쳐가는 졸업, 취직, 결혼을 통해 삶의 모습이 굵직굵직하게 변했고, 그 과정 중에 경험한 몇 번의 연애와 이별, 몇 번의 이직, 그리고 낯선 여행길에서 건진 특별하고 값진 경험들이 내 자아의 결과 인생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근, 가장 커다란 전환점이 된 일을 꼽자면 아일랜드에서 만난 아이리쉬 남자와 결혼해 아일랜드에서 외국살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내 삶의 터전이 바뀌었고, 직업이 사라졌고, 사용하는 언어와 만나는 사람들과 매일 바라보는 풍경이 바뀌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지 벌써 3년. 지금의 내가 있다.
3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3년이 3개월처럼 흘렀다고 우겨도, 그건 사실이다. 영원히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았던 아일랜드의 지랄맞은 날씨와 도통 알아듣기 힘든 아이리쉬 억양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전혀 다른 문화와 성장배경을 가진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이 편안하고 재밌는 일이 되는 데 기여한 세월이랄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10년 넘게 글밥으로 경제적, 정신적 독립을 지켜왔던 사람으로서, '글쓰는 사람'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해 힘들었던 시간이기도 하다. 아일랜드 생활과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내는 것이 처음 이곳에 올 때의 꿈이자 계획이었는데, 쓰다 만 글 조각들이 틀거리 없이 쌓여 있는 컴퓨터 파일을 보면 그냥 이렇게 흐지부지 되는 게 아닐까 속상하고 조바심이 났다.
외국에 사는 것은 외국을 여행하는 것과 확연히 달라서, 어떤 나라에 살든 상관 없이 여행할 때 만나는 찰나의 강렬한 느낌과 이미지를 경험하며 살긴 어려운 것 같다. 지도를 보며 찾아낸 멋진 건물이나 거리를 거닐며 감탄을 연발하게 되는 '정착기'가 끝나면, 멋진 풍경보다 어디에 싼 마트가 있고, 어디에서 버스를 타야 집에 효율적으로 갈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그렇게 살다 보니 처음 아일랜드에 왔을 때 느꼈던 신선한 감성들은 점점 무뎌지고, 글을 쓰려고 컴퓨터를 켜도 특별한 쓸 거리가 떠오르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런데 신기하다. 다 때가 있는가 보다. 아일랜드가 나에게 다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공원을 지날 때 뺨을 스치는 바람결 한 자락이,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이, 지금 이 글을 쓰며 바라보고 있는 던리어리 항구의 낯은 물빛이, 마음을 두드린다. 다시 시작하라고, 꿈꾸기를 멈추지 말라고, 그저 내가 하루하루 경험하고 느끼는 아일랜드의 삶을 편안하게 들려주면 되는 거라고 격려해준다. 2015년 7월 1일, 이렇게 나의 아일랜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