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기대처럼 흐르지 않을 때
하루의 시작과 끝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시작한 아침이 침묵 속에 숨고 싶은 저녁이 되기도 하고, 입맞춤이 그치지 않던 아침이 등을 돌리고 누워자는 저녁이 되기도 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아침의 분주함과 긴장감이 해 저무는 하늘 아래 즐기는 휴식으로 바뀌기도 하고, 아침의 오해가 긴 밤의 깊은 대화 속에서 풀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오늘 아침 아일랜드의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화창했다. 창문을 여니, 매미의 삶처럼 짧고 강렬한 아일랜드의 여름햇살이 상쾌한 공기를 타고 쏟아져 들어왔다. 난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민소매 탑에 슬리퍼를 신고, 그리스로 휴가를 갈 때 샀던 밀짚모자까지 꺼내 썼다. 머리를 살짝 옆으로 땋아내리고 모자를 썼더니 제법 예뻐 보여 기분도 좋았다.
그런데, 나는 지금 낮고 흐린 하늘 아래 조금 외롭고 정체된 오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평소 자주 가는 IFI cafe에서 홍차 한잔과 함께 앉아. 아침에 사소한 일로 존과 말다툼을 좀 했는데 다른 날과 달리 기분이 잘 안 풀리는데다, 잔뜩 기대하고 참여한 워킹투어가 실망스러워 중간 휴식시간에 빠져나온 터다. 원래 오늘 하루 관광객이 되어 그동안 무심히 지나쳐 다녔던 건물이나 장소에 대한 역사와 숨은 이야기들을 좀 들어볼 참이었다. 그래서 블로그에도 좀 풀어놓고, 나중에 책에 담을 지식도 좀 얻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규격화된 이야기라는 느낌이 드니 더 이상 있기가 싫었다. 게다가 중간 휴식시간에 파인트 한 잔씩 하라며 특정한 펍으로 데리고 가는데 펍 장사 시켜주려는 의도가 뻔히 보여 기분이 별로였다. 다들 즐겁게 돈 내고 기네스 한 잔씩 마실 텐데 나는 그런 관광객놀이가 영 싫은 걸 보니, 나도 아일랜드에 꽤 살긴 했나 보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도망쳐 나와서는 미팅스퀘어 한켠 벤치에서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순간 좀 더 참고 끝까지 있다 올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스치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았으니...
희망과 기대로 시작한 오늘이 나를 배신할 지라도 어차피 인생이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매일 아침 내 마음을 새롭게 리셋하는 것이 아닐까. '어제'의 기분과 상황이 어땠든 '오늘'은 신이 허락한 새로운 날, 24시간이라는 특별한 선물"이라는 걸 기억하며. 일단 내일 아침이 되기 전에 '존과 화해하기'라는 숙제가 남아 있지만, 다행이다. 다시 햇살이 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