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y에서 Greystones까지 걷다
뭔가 마음먹고 이러저러한 계획을 세웠는데, 오히려 약올리는듯 아침부터 일이 꼬이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늘 존의 출근길에 따라 나서고 퇴근길에 만나 같이 들어오던 일상에서 하루 벗어나, 오전에는 집에서 한국에 전화 걸 일들을 처리하고 오후엔 오랜만에 청소, 빨래, 요리 등등 집안일을 좀 하자고 어젯밤 마음먹었더랬다. 그런데 세금문제로 통화를 해야하는 마포구청은 10번 넘게 전화를 시도해도 계속 통화중. 내 아이디가 불법으로 도용되었다며 접근을 막아버린 '다음'에 전화해 보호조치를 해제해 달랬더니 마이핀 번호를 받아 알려달란다. 보통 휴대폰인증을 통해 본인확인을 하는데, 내 한국 휴대폰이 정지되어 있으니 그 방법밖에 없다는 거다. 그래서 마이핀인증 사이트에 들어가 발급을 시도하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중간에 계속 에러가 나면서 셧다운. 역시 10번 정도 시도하다가 열불이 나서 컴퓨터를 꺼버렸다. 시간을 확인하니 한국시간으로는 저녁 6시가 넘었으니 콜센터 근무시간도 끝났을 터. 어차피 오늘은 물건너 간 거다. 그럼 빨래라도 할까 했더니, 하우스메이트인 그렉과 캐롤리나가 어제 저녁부터 돌리기 시작한 세탁기가 아직도 돌고 있다. 옷장에 있는 옷을 모조리 꺼내 빨기라도 하는 거냐, 겉으로는 티도 못내고 속으로 씩씩 대고 앉아 있자니, 스트레스지수가 쭉쭉 올라간다. 아, 스트레스가 쌓이면 왜 꼭 정크푸드가 땡기는 걸까! 짜고 기름진 감자칩 한봉지를 순식간에 털어넣고 냉장고에 하나 남은 아이스크림까지 해치우는 순간 죄책감이 밀려들었지만, 후회하긴 이미 늦었다. 청소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 지 오래. 이럴 땐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한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답답하고 짜증나는 마음을 잘 다스려지지 않을 때면 나는 무조건 걷는다. 더부룩한 속이 좀 가라앉도록 빠른 걸음으로 익숙한 풍경들을 지났다. 아침마다 존과 커피 한잔을 사서 나눠 먹곤 하는 편의점 앞을 지나고 브레이에 사는 모든 개들을 만날 수 있는 공원을 가로질러 브레이 타운에 닿았다. 동네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잠시 숨을 고르면서 휴대폰을 보는데, 7월 23일이란 오늘 날짜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앗, 그때 생각났다. 존과 첫 데이트를 한 날이 바로 4년 전 오늘이었다는 것. 존에게 바로 문자를 날렸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4년 전 우리가 처음으로 둘이 만나 브레이에서 그레이스톤까지 걸어간 날이야...'
잠시 후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 넘어 존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4년 전 오늘이라고? 그냥 얼마 전 일 같은데.....4년이란 시간이 언제 가버린 거야? 그나저나 우리 가끔 싸우긴 했어도 4년 동안 참 재밌게 잘 지냈지?
전화를 끊고 나니 4년 전 그와 처음 만나 지금에 오기까지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 무수한 설렘과 환희, 눈물과 아픔, 회복의 순간들을 지나며 우리가 이만큼 더 깊어졌구나 생각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시간이 좀 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참 감사했다. 커피를 마시고 밖으로 나오니 햇빛이 눈부셨다. 바람 곁들인 볕자락이 춤출 때마다 내 마음도 울렁였다.
특별한 날이니만큼 아침에 일어났던 '꼬였던' 일은 일단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뭔가 의미 있는 기억을 남기고 싶었다. 문득, 4년 전 오늘의 추억을 따라가 보고 싶어졌다. 브레이역에서의 반갑고도 어색했던 첫 만남, 그리고 2시간의 긴 산책길 내내 끊이지 않았던 아주 사적이고 깊은 대화들... 내 발걸음은 어느새 브레이역을 지나 그레이스톤으로 향하는 산책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사이 울퉁불퉁하던 길이 평평하게 닦여지고 양옆으로 우거진 수풀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 덕분인지 예전에 비해 트래킹복 차림의 유모차를 끌고 가는 가족들과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평소보다 베낭을 조금 가볍게 하고 나온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언제 해가 반짝였나 싶게 하늘은 다시 온통 구름이다. 그래도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걷기에는 너무 해가 쨍쨍한 날보다 이런 날이 제격이다. 길은 점점 집과 펍들로부터 멀어져 바다와 절벽과 나무들 사이로 이어졌다. 평일 낮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가끔씩 마주치는 사람들과 '하이' 인사하고 지나치면 다시 한동안 바닷새들과 산벌레들의 수다, 그리고 내 신발이 흙바닥과 부딪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4년 전 그때 내 영어는 지금보다 훨씬 못했다. 그래서 존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고,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자유롭게 다 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우린 참 많은 얘기를 나눴던 것 같다. 각자의 가족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어쩌다 보니 가족관계에서 힘들었던 얘기, 어릴 때 받았던 상처들에 대한 얘기들까지 오픈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있지? 그런데 오랜 친구와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니 신기하군...
우린 중간중간 멈춰서 다리를 쉬며 절벽 아래 멋진 풍경을 함께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존의 옆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교회에서 볼 때는 늘 활발하고 에너지 넘쳤던 그에게서 쓸쓸한 방랑자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때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파란눈의 외로운 영혼이 나의 짝일지도 모른다는 아주 어렴풋한 '감'을 처음 느낀 때가.
1시간 반 정도 걸었을 때 드디어 저만큼 그레이스톤 타운의 모습이 보였다. 목적지가 보이니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이후 20분쯤 평평히 펼쳐진 들판을 따라 걷자 산책길이 끝나고 작은 항구가 나를 맞아준다. 여기서부터가 그레이스톤이다. 나의 다음 코스는 그때 우리가 이 긴 산책을 마치고 함께 갔던 채식레스토랑 <해피페어(Happy Pear)>. 채식주의자인 나를 위해 그날 처음으로 존이 데려갔던 곳인데, 그때 이후로 가끔씩 특별한 점심을 먹으러 가곤 하는 우리 아지트가 되었다.
바람은 쌀쌀했지만 오늘은 바깥 테이블에 앉았다. 따뜻한 고구마스프에서는 코코넛향이 났다. 병아리콩과 현미를 섞어 만든 고소한 샐러드와 비트루트(빨간무)와 배가 들어 달콤하면서도 시원한 샐러드 두 가지를 남김 없이 비워내고는, 후식으로 커피를 홀짝이며 또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점심을 먹은 후 존은 나에게 비밀문을 통과해 바닷가로 가자고 했다. 그가 말한 비밀문은 곁길에 있는 작은 터널이었는데, 그곳을 통과하니 거짓말처럼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우리가 바다 가까이 닿았을 때 그가 갑자기 '아 좋다!' 하며 모래밭에 벌러덩 대자로 누웠다. 나도 그의 옆으로 가 베낭에 기대고 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말 없이 그렇게 있었다. 눈을 감으니 파도 소리와 햇빛의 온도만 현실로 남았다. 그리고 그때 우리도 몰랐던 우리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