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Galway Art Festival
비 내리는 목요일. 잔뜩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골웨이는 지금 제대로 축제 분위기다. 거리의 아티스트들과 축제를 즐기러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이 작은 도시가 발 딛을 틈 없이 북적이고 있었다.
올해로 세 번째, '골웨이 인터네셔널 아트 페스티벌'(Galway International Arts Festival)을 즐기기 위해 골웨이에 왔다. 4년 전 처음 혼자 왔을 때, '앗, 동네 축제인 줄 알았더니 진짜 인터네셔널하군!' 하며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골웨이 페스티벌은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페스티벌, 프랑스의 아비뇽 페스티벌 등 이웃나라의 유명한 아트페스티벌과 비교해도 결코 수준이 뒤처지지 않는다. 오히려 덜 알려졌기에 덜 상업화되고 좀더 아이리쉬적이며, 사람들도 좀더 여유롭게 축제를 즐기고 있는 느낌이 더 매력적이랄까. 거기에 '골웨이'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자연적, 문화적 분위기가 더해져 골웨이 페스티벌만의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내고 있다. 작년에는 내가 먼저 가고 존이 주말에 합류하는 식으로 함께 페스티벌을 즐겼더랬다. 존과 함께 즉흥적으로 선택한 미국의 인디뮤지션 '사라'의 콘서트는 기대 이상이었고, 골웨이의 숨은 맛집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올해는 다시 혼자다. 원래 이번에도 존이 주말에 합류하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쉬프트가 바뀌는 바람에 토요일에도 일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단 이틀 떨어져 지내는 건데도 기차 안에서 헤어질 때 슬쩍 눈물바람을 했다. 너무 익숙해져서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는 그 사람의 자리가, 이렇게 혼자 여행을 떠나면 금새 드러난다. 언제 내가 혼자만의 여행을 그토록 즐겼었나 싶게, 둘이 같이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져 버렸다. 하지만 재밌는 건, 그렇게 남편을 그리워하면서도 모든 선택권이 오롯이 나에게 있는 혼자만의 시간이 싫지 않다는 거다. 얼마간의 외로움과 함께 찾아오는 고요한 자유의 느낌. 싱글시절, 홍대 작은 오피스텔에서 만났던 그것. 부부라도 가끔은 이런 각자의 독립된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혼자 베낭을 메고 더블린으로, 다시 골웨이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골웨이의 백패커 호스텔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골목들을 반가운 마음으로 걸었다. 오래된 펍과 트렌디한 카페가 나란히 있어도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지는 건 골웨이의 열린 마음 덕분일 것이다. 더블린보다 규모는 훨씬 작지만 남다른 생명력이 느껴지는 도시. 예술과 축제, 아름다운 바다가 있으니 결코 지루하진 않을 테지. 문득 이곳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올해는 먼 나라에서 참여한 작가들의 독특한 작품들이 눈에 띄었는데, 그 중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 페트리샤 피씨니니(Patricia Piccinini)의 <Relativity> 전시는 SF영화를 3D로 보고 있는 듯한 강렬함을 남겼다.
상상의 생명체에 관계와 사랑이라는 휴머니즘을 불어넣음으로써 '과학과 자연, 예술, 환경 사이의 연결성을 탐구하고 있는' 그녀의 설치작품들은 일단 어려운 작품 해석을 차치하고라도 관람 자체가 엄청 즐겁다. 실제 사람의 피부 감촉과 디테일을 그대로 재현한 설치물들을 보고 있자니 스필버그영화의 특수효과 현장에 와 있는 느낌.
저녁에는 아주 특별한 공연 하나를 보았다. 사우스아프리카 작가 브랫 베일리(Brett Bailey)의 <Exhibit B>. 무대공연과 설치예술을 접목시킨 독특한 작품으로, 13명의 흑인배우가 각각 다른 내용의 설치물을 연기한다. 13개의 각 설치물은 아프리카에 남겨진 유럽의 역사와 식민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관객들은 무대에 세팅된 전시라인을 따라 이동하며 슬프고 가슴 아픈, 때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하고 끔직한 역사적 진실을 하나하나 마주하게 되는데, 그 과거의 이야기들이 살아 있는 배우들의 눈빛을 통해 현재, 지금의 이야기로 되살아나는 순간 마음에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조각처럼 정지되어 있는 배우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설치물이 된 배우들과 그 설치물을 바라보는 관람객이 눈빛을 통해 주고받는 무언의 커뮤니케이션은 내가 이전에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렬한 것이었다. 어쩐지 불편하면서도 친밀하고, 깊고, 따뜻한.....이 공연을 만난 것만으로도 올해 골웨이 페스티벌은 개인적으로 충분한 의미를 남겼다.
둘째날 큰 기대를 안고 간 모노연극 <Match Box>는 작품성으로는 의심할 여지 없이 훌륭했으나, 2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 여배우의 독백을 따라가는 것이 아직도 내 영어실력으로는 쉽지 않다는 아픈 깨달음과 함께 절반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언제쯤 내가 좋아하는 연극과 영화를 한국말처럼 이해하며 볼 수 있게 될런지. 속상한 마음에 숙소에 돌아와 일찍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창밖에서 들려오는 오페라 사운드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심상치 않았다. 앗, 밤 10시부터 시작한다는 <The Giant Divas>의 퍼레이드가 지나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 그래도 골웨이 여행의 마지막 밤인데 지금 잠들긴 아깝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고 거리로 나갔다. 퍼레이드는 바로 내 호스텔과 맞닿은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거대한 드레스를 입고 광대처럼 흰 마스크 분장을 한 배우들이 부르는 오페라곡의 멜로디가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골웨이 타운 골목골목에 울려 퍼졌다. 퍼레이드가 지나간 자리에는 다양한 거리뮤지션들이 저마다의 음악으로 축제의 열기를 이어나갔다. 젊은 히피들 네다섯 명이 북을 치며 탭댄스를 추기 시작하자 사람들도 하나 둘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고 어느새 거리 전체가 댄스장이 되었다.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자유로운 영혼들의 춤의 향연은 끝날 줄을 몰랐다.
도미토리룸의 으례적인 소음들 때문에 이래저래 잠을 설치고 일찍 눈을 떴다. 더블린으로 돌아가는 날. 원래 떠나기 전 Salthill의 해변도로를 따라 산책하려고 했지만,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도록 그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쉽지만 깨끗이 포기하고 호스텔 체크아웃을 마친 뒤 몇 년 전 우연히 발견한 좁은 골목의 작은 카페에 찾아 들었다. 내가 이제까지 먹어본 중 가장 맛있는 치즈스콘을 단돈 2유로에 파는 곳. 허브차도 1.7유로밖에 안하는데, 새로운 티백으로 무료리필까지 해준다. 이곳에서 노닥노닥 시간을 보내는데, 존에게서 전화가 왔다.
"더블린에 몇 시 도착해?" "2시 45분 버스 타면 5시쯤?" "오늘 일 좀 일찍 끝날 것 같으니까 난 4시반이면 타운에 있을 거야. 와인 한병 사가지고 레바니즈 음식 먹으러 가자. 빨리 보고 싶다...쫌 있다 봐!"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존이 더 많이 보고 싶어졌다. '남편아, 이틀간의 자유를 허락해줘 고마워...!' 나의 짧은 축제는 끝났고, 이제 그가 있는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와 함께 나누는 식탁과 침대가 있는 그곳, 나의 집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