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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Sep 04. 2019

문화예술이 피고 삶이 숨쉬는 곳, 아이리시펍

프랑스에 카페가 있다면 아일랜드에는 펍이 있다!


더블린은 국제도시답게 다국적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모임 장소는 전통 펍이다. 물론 친구 두서넛과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실 때는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만나기도 하지만, 생일 파티나 요즘 대세인 밋업(meet up, 온라인커뮤니티를 통해 같은 취미나 관심사를 가지고 모인 사람들의 오프라인 모임) 같은 단체 모임이라면 단연 펍이 대세다. 하긴 비바람이 잦은 자연환경에서 사람들이 야외 활동을 즐기기보다 안으로 모여드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싶다. 특히 춥고, 비가 자주 내리고, 밤은 일찍 찾아오는 아일랜드의 길고 우울한 겨울을 펍에서 나누는 왁자지껄한 농담과 웃음 없이 나기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용하고 편안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펍의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펍은 엄청나게 시끄럽다. 옆 사람과 말할 때도 거의 소리 지르듯 해야 할 때가 많다. 게다가 아일랜드 사람들은 펍의 안이든 밖이든 잔을 들고 서서 마시는 데 익숙하다. 사람이 많을 때는 펍 앞의 인도까지 점령한다. 20분만 지나면 다리가 아프고 팔도 아프다. 한겨울에 민소매드레스와 하이힐 차림으로, 무거운 파인트 잔을 한손에 들고 밖에 서서 술을 마시는 아이리시 여자들을 보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아이리시들은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도 두루 말을 섞으며 가볍고 격식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솔직히 나처럼 낯가림이 있는 사람에게는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나마 처음 말을 트고 대화가 어느 정도 풀린다 싶은 사람이 갑자기 자리를 뜨거나 다른 사람과 대화를 시작해서 민망했던 적도 여러 번 있다. 물론 지금은 거의 아이리시 수준을 달성했다.

어쨌든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이 피어나고 크고 작은 모의가 이루어진다. 예술가들은 예술을 논하고, 문학가들은 문학을, 사업가들은 사업을 논하는 곳. 한 마디로, 프랑스 파리에 카페가 있다면, 더블린에는 펍이 있다. 밴드 공연, 코미디 쇼,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일반적으로 어떤 컨셉을 전달할 때 이야기화법으로 풀어내는 방식을 말한다. 여기서는 ‘아일랜드의 전설과 민화를 청중 앞에서 연기하듯 들려주는 방식‘의 뜻), 플리 마켓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장소, 그래서 관광객에게 가장 많은 볼거리를 선사하는 곳도 바로 펍이다. 특히 관광특구인 템플바#Temple Bar와 그래프턴#Grafton 거리 주변으로 유명한 펍들이 몰려 있다. 그리고 많은 펍이 매일 밤 아이리시 전통 음악을 비롯해 다양한 밴드 공연을 쉬는 날 없이 선보인다. 게다가 대부분 무료다!

템플바 구역의 상징이자 더블린의 대표적 명소인 더템플바#The Temple Bar, 제임스 조이스가 즐겨 찾았다는 데이비번스#Davy Byrnes와 더베일리#The Bailey, 더블린의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더포터하우스#The Porter House, 10평 남짓한 지하의 작은 펍 더도슨라운지#The Dawson Lounge, 아일랜드 국민밴드 더블리너스가 사랑한 오도너휴스#O’Donoghues,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펍으로 스토리텔링과 아이리시 전통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더브레이즌헤드#The Brazen Head 등 사실 유명하다는 펍을 일일이 소개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란다. 물론 외국에 오래 살다보면 눈이 휘둥그레져서 열심히 셔터를 누르던 처음의 감동과 흥분은 서서히 퇴색한다. 그다음부터는 관광객이 몰리지 않는 장소, 가이드북이 추천하는 유명한 곳보다는 로컬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는 곳이나,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냥 내 맘에 드는 곳을 찾아 나서는 거다. 그때부터 그 도시에 사는 진짜 재미가 시작된다.

 

한번은 존이 글래스네빈 공동묘지 옆에 있는 ‘그레이브디거스#Gravediggers’(무덤 파는 사람들)라는 펍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공동묘지에서 땅을 파던 인부들이 중간에 쉴 때나 일 끝내고 기네스 한 잔씩 하러 가던 펍이래. 더블린에서 아주 오래된 펍들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래서 원래 이름은 ‘존 캐버너프#John  Kavanagh’인데, ‘그레이브디거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고 했다. 존이 일을 일찍 마친 하루, 우리는 더블린 북쪽에 있는 그레이브디거스로 차를 몰았다. 한눈에도 오랜 단골로 보이는 사람들 몇몇이 바맨과 웃음 섞인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뿐, 평일 오후의 펍은 조용했다. 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는 약속이나 한 듯 잘 익은 기네스가 한 잔씩 놓여 있었다. 오래된 펍에서 풍기는 묵은 나무 냄새와 발효된 보리 냄새가 어우러져 묘하게 아늑했다. 우리도 기네스를 시켜 한 손에 잔을 들고 펍 밖으로 나오니 담장 너머로 바로 글래스네빈 공동묘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누군가의 땀과 수고로 세워졌을 수많은 묘들이 세월의 때를 입고 그곳에 있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직업이지만 모든 노동을 손으로 하던 시절, 공동묘지에서 무덤을 파는 ‘그레이브디거스’는 하나의 특화된 직업이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은 아니었다. 한국의 농부들이 농사일을 하다가 잠시 쉴 때 막걸리로 목도 축이고 출출한 속도 달래는 것처럼, 그들도 그렇게 기네스를 마셨다. 아일랜드의 궂은 날씨를 견디며 고단한 노동을 하던 이들에게 기네스 한 잔이 건네는 위로는 어떤 것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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