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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Oct 16. 2019

문화예술 잔치로 풍성한 더블린의 가을

- Dublin Culture Night

9월이 되면 여름 동안 가족들과 떠들썩하게 휴가를 보낸 아일랜드 사람들도 차분하게 학교로, 일터로 복귀한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의 추억을 뒤로하고 열공, 열일 모드 속에 가을이 깊어갈 때쯤, 컬처 나이트, 더블린 프린지 페스티벌, 더블린 시어터 페스티벌까지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는 다양한 예술문화 축제가 펼쳐진다.  


2006년에 시작된 ‘컬처 나이트(Culture Night)’는 매년 9월 중순경 딱 하루 동안 더블린 곳곳에서 펼쳐지는 문화축제다. 유명한 박물관이나 갤러리는 물론, 도시 구석구석 다양한 문화예술 공간들이 문을 열고 각자 개성에 맞는 행사를 마련한다.2018년 컬처나이트, 나는 ‘에비 씨어터(Abbey Theatre)’에서 주최한 가이드투어에 참여했다. 에비 씨어터는 1904년 W. B. 예이츠가 설립한 아일랜드 최초의 국립극장으로, 1951년 공연 중 화재로 소실된 후 1966년 아이리시 건축가 마이클 스콧(Michael Scott)의 설계로 지금의 현대식 건물이 탄생했다. 그는 일부러 화려한 장식을 배제하고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는 마술 상자의 이미지를 차용해, 건물 안에서 일어나는 예술 창작의 역동성과 신비를 역설적으로 강조했다. 에비 씨어터 로비 벽에 걸려 있는 켈틱 디자인의 거울은 오리지널 건물에서 살아남은 유물이다. 관객들이 오가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행위가 곧 무대 위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는 연극 예술의 의미와 닿아 있다. 공연장 입구 옆에 걸려 있는 동판도 주목해볼 만하다. 에비 씨어터 공동설립자인 W.B.예이츠와 아우거스타 그레고리가 1916년 아일랜드 시민혁명에 참여했던 공연예술인 16인에게 선사한 감사패다. 숀 코널리, 바니 머피, 헬레나 몰로니, 엘렌 부쉘, 아더 쉴즈 등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에비 씨어터의 투어가이드 제임스를 따라 바람 부는 거리로 나섰다. 에비스트리트 건너편에서 바라본 극장은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물살을 버티며 꿋꿋하게 서 있었다. 천 년 넘는 영국의 지배 아래,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혁명의 시대를 통과하며 자유로운 예술혼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아이리시 예술가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제임스는 에비 시어터를 오른편에 두고 돌아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빌딩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아이리시 노동자연대 본부이자 아이리시 시민군의 본부로 사용된 ‘리버티 홀(Liberty Hall)’이다. 시민군과 노동자들은 이곳을 통해 모은 활동자금의 일부를 에비 시어터의 공연 제작 후원비로 사용했다고 한다. 높은 계층의 전유물처럼 소비되어온 공연예술은 이렇게 더블린의 심장부에서 시민들의 땀으로 지켜지고 새로운 차원의 예술로 나아갔던 것이다. 오코넬 스트리트(O'Connell Street)의 끝자락에 이르면 오래된 석조건물 ‘앰배서더 씨어터(Ambassador Theater)'가 나타난다. 지금은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더블린에 현존하는 극장 중 두 번째로 오래된 건물로, 바로 옆에 있는 게이트 씨어터(Gate Theatre)와 함께 20세기 초 더블린 공연예술의 주요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에비 씨어터가 현대적인 무대, 동시대적 공감을 일으키는 작품들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라면, 게이트 씨어터는 고전적인 작품과 무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극장이다. <햄릿>, <맥베스> 등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빨간 카펫이 깔린 발코니 석에 앉아 감상하는 재미는 유럽의 극장이기에 가능한 경험이다.

투어가 끝난 후 나는 존을 만나기 위해 ‘뷰리즈 카페(Bewley’s Cafe)’로 향했다. 버스킹과 쇼핑거리로 유명한 그래프튼 스트리트에 위치한 이 카페는 더블린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로 늘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으로 붐빈다. 제임스 조이스와 사뮈엘 베케트 등 유명한 더블인의 문인들이 즐겨 찾았고, 펑크밴드 더붐타운래츠의 밥 겔도프,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은 시네이드 오코너도 좋아하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운 좋게 발코니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면 생기 넘치는 그래프튼 거리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최근 수년간의 내부 리모델링을 마치고 다시 오픈한 뷰리즈는 고전미에 세련미를 더한 고급 살롱 분위기가 난다. 덩달아 가격도 올랐다. 물론 카페 정문과 창문에 새겨진 해리 클라크의 스테인드글라스, 벽난로 등 중요한 아이콘들은 원래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만, 유명한 더블린의 문인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던 수더분한 찻집의 느낌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예전에는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남아 있는 오래된 나무 난간과 빛바랜 카페트가 주는 운치가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새로 지은 5성급 호텔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그건 어쩐지 좀 슬프다.존과 나는 일본 음식점 야마모리(yamamori)에서 가지두부 튀김을 곁들여 맥주를 한 잔씩 마시고 거리로 나섰다. 이른 저녁의 온화하고 여린 빛이 거리에 가득했다. 우리는 차를 세워둔 아버힐 쪽으로 가는 길에 RTE 라디오에서 주최하는 야외 콘서트에 들러보기로 했다. 행사는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reland- Decorative Arts & History) 뜰에서 열리고 있었다. 바람은 꽤 쌀쌀했지만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아 코발트빛으로 청명한 저녁 하늘이 아름다웠다. 핸드메이드 액세서리, 디자인 프린트 티셔츠 등을 파는 가게들이 축제 분위기를 돋우고, 무대 위에서는 거짓말처럼 요즘 핫한 아이리시 뮤지션 ‘개빈 제임스(Gavin James)’가 특유의 말랑한 사랑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박물관 뜰을 나와 차를 가지러 가는 길에 존이 건너편의 한 작은 교회를 가리켰다. “혹시 저기 가볼래? 그리스정교회인데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저기서도 컬처 나이트 행사를 하나봐!” 정통 교리를 중시하는 가톨릭의 한 종파라는 건 알았지만 더블린에 그리스정교회 건물이 있는 건 몰랐었다. 우리는 길을 건너 노란 불빛을 향해 걸었다. 빼꼼히 열려 있는 나무 대문 사이로 까르르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으로 들어서니 그리스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뜻밖의 늦은 손님 둘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밖에서 볼 때는 아일랜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교회였는데 내부는 신세계였다. 금색 바탕에 성자들의 모습을 그린 크고 작은 성화들이 벽과 천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촛불을 봉헌하는 제단과 예배를 주재하는 강단도 독특한 스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 화려한 반짝이 드레스를 입은 꼬마 아가씨 둘이 그리스 전통 춤을 보여주겠다며 손을 마주 잡고 오른쪽으로, 또 왼쪽으로 뜀뛰며 돌았다. 그리스다운 왁자지껄함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들도 아일랜드라는 이국땅에서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통해 문화를 지키고, 그 안에서 외국살이의 외로움을 위로받는 것이리라. 문화적 자극으로 고무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음 주면 ‘프린지 페스티벌’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슬퍼졌다가, 10월 첫 주에 시작하는 ‘더블린 시어터 페스티벌’을 기억하고 힘이 났다. 어쨌든 한동안은 극장에서 가을의 쓸쓸함을 달랠 수 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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