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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Mar 28. 2019

사랑해도 떠나야 할 때

마음의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밤새 시끄럽게 울었다. 가끔 비가 섞여 지나갈 때는 누군가 창문이 부술 듯 두드리는 것 같았다. 미국을 강타한 허리케인 때문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넘어온 미세먼지로 한국이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는 것도 그렇고, 슬프게도 작은 나라는 늘 큰 나라의 희생양이 된다. 국력을 길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작은 덩치에 힘 있는 나라가 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난 바람이 너무 좋아! 바람만 불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목적지 없이 하염없이 걷고 싶어.“ 이렇게 말하고 다니던 이삼십 대의 내가 생각나 조금 웃었다. 지금 나는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데, 전기장판에 등짝을 붙이고 이불 속에 숨어 있고만 싶은데.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좋아하던 바람은 이렇게 매섭고 사나운 바람이 아니었다. 내 기억 속의 바람은 시원하게 땀을 식히거나, 포근하게 뺨을 어루만지거나, 신선한 공기를 곁에 보내주는 다정한 아이였다. 그런데 아일랜드에 살면서 비도 바람도 더 이상 달갑지 않게 되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있으면 설레기보다 거리로 나설 일이 걱정부터 된다. ‘나이를 먹은 탓‘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나이 때문에 내가 더 이상 바람을 사랑하는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건 너무 슬프다. 어쩌면 아일랜드를 떠날 때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못된 애인 흉내를 내본다. 살다보면 사랑해도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할 이유가 생기기도 하니까. 내가 아일랜드를 사랑하는 마음을 의심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일 년 열두 달 중 열 달은 춥고 흐리고 축축한 아일랜드 날씨에 많이 지친 것 같다. 아무리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음식을 먹어도 수족냉증과 민감성대장증후군에서 일 년 내내 벗어날 수가 없다. 따듯한 나라에서 살고 싶다. 혹은 1~2년만이라도 살다가 오고 싶다. 일 년 내내 따뜻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1년의 반은 햇살 내리는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존은 “한국 가서 살까?”라고 종종 묻지만 미세먼지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솔직히 엄두가 안 난다.

존과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나라는 스페인이다. 스페인도 지역에 따라 날씨가 꽤 다르지만, 어느 지방이든 1년 중 6개월은 해를 마주할 수 있고, 물가도 아일랜드보다 싸니 매력적이다. 문화적으로 끌리는 나라임은 말할 것도 없다. 3년 전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요즘은 운명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준비하고 있는 아일랜드 여행에세이의 발간이 개인적으로 내 아일랜드 생활의 마침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정을 떼려고 한 권의 책을 내는 과정이 이렇게 지난한 것인지도. 올 가을 책이 세상에 나오면, 나는 미련 없이 아일랜드에 ‘안녕‘을 고할 수 있을까?

나는 진심으로 아일랜드를 사랑한다. 아일랜드의 끝없는 초록들판도, 친절하고 재밌고 술 너무 많이 마시는 아일랜드 사람들도, 붉은 벽돌집과 색색의 대문들도 사랑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바람과 비마저도 아일랜드이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해도 떠나야 할 때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먼 북소리>라는 책에 썼듯, 그때는 마음의 북소리가 알려준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내 마음 저 먼곳에서부터 작은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떠날 때 후회없도록, 더 열심히 아일랜드를 사랑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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