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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Jan 22. 2020

그날 더블린 페어뷰에서 사자를 보았나요?

한 맹수조련사에 대한 오마주 <Fortune’s Wheel>

쌀쌀한 바람이 귓볼을 얼얼하게 하던 1951년 11월,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였다. 더블린 페어뷰 지역은 여느 때처럼 공원에서 운동을 하거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더블린 베이를 따라 산책하는 사람들로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때 믿지 못할 진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커다란 암사자 한 마리가 차가 오가는 도로를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뒤로는 한 젊은 남자가 사자를 따라잡기 위해 풀스피드로 속력을 내고 있었다.

혼비백산 소리를 지르며 멀리 달아나는 사람들부터 거짓말 같은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사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까지, 제각각 사자 주위로 흩어지고 모여드는 사이, 길을 건넌 사자는 페어뷰 공원 쪽으로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사자를 따라서 길을 건넌 남자는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사람들에게 “위험합니다! 가까이 가지 마세요!” 하고  소리치며 계속 사자를 좇았다.

마침 페어뷰 그랜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 초등학생 무리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한 마리의 사자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사냥꾼들에 대한 영화 <정글 스탬페드>라는 영화였다. 영화의 한 장면이 실제 눈 앞에서 펼져지고 있는 현실에 학생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자를 좇고 있는 남자는 사자의 주인이자 조련사인 빌 스페판이었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를 탈출한 사자가 이미 마르빌 에비뉴에 있는 작은 상점에 출몰해 상점 안에서 물건을 사고 있던 사람들을 거의 기절 직전까지 몰고 간 데 이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있던 10대 소년에게 다가가는 것을 자신이 달려가 겨우 몸으로 제압한 상태였다. 이렇게 거리를 누비다가 깜짝 놀란 행인들을 갑자기 공격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빌이 공포에 질린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젊은 청년 빌에게는 세계 최고의 맹수조련사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 꿈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버티게 했고, 모두의 걱정과 만류를 뒤로 하고 자신을 사자를 사서 돌보며 스스로 훈련을 해온 것이다. 그래서 경찰이 출동해 사자를 총으로 쏘려했을 때, 그는 전심을 다해 “제발 쏘지 말아 달라, 자신이 제압해서 다시 우리에 넣을 테니 기회를 달라“고 사정했다. 경찰이 그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주긴 했지만, 직접 사자를 제압하겠다는 약속은 사실상 자신의 목숨을 건 시도였다. 다행히 그는 다년간 함께 지내며 서커스와 각종 쇼에서 함께 호흡을 맞춰온 사자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영화와 비슷한 장면을 눈앞에서 보고 흥분한 아이들은 사자를 구경하기 위해 벽을 타고 기어올랐다. 빌은 아이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아이들이 쉬지 않고 소리를 지르는 통에 스트레스를 참지 못한 사자가 곁에 있던 빌의 어깨를 물었다. 사자는 맹수고, 맹수는 맹수다. 안타까운 선택이지만, 한번 피 맛을 본 맹수를 제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빌은 무장경찰에게 사자를 총으로 쏘아 달라고 부탁했다. 총탄이 울리고, 맹수는 바닥에 쓰러졌다. 한순간 마을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단 몇 초. 그 짧은 순간, 사자의 생명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맹수조련사가 되려 했던 빌의 꿈도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유명해지고 싶었던 꿈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 뜻밖의 사건으로 빌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 각지의 뉴스와 신문이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이탈리아의 한 잡지는 아예 시리즈물로 연재하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우리를 탈출한 사자가 집 안에 있던 어린아이를 공격하려고 하는 순간 사자를 발견하고 추격하기 시작한 용감한 맹수조련사의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색을 입혀 더욱 흥미로운 무용담을 만들어냈다. 빌이 평범하고 안정된 직업을 갖기 원했던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빌의 무용담을 떠들기 바빴다. 어쩌면 그때라도 가족들의 바람대로 좀 더 안전한 직업으로 바꾸는 것이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사자에게 물리는 사고를 당하고도 빌의 의지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그는 미국의 커다란 서커스단의 단원이었던 아가씨 메이와 결혼한 후, 더욱 과감한 선택을 한다. “사자를 한 마리 더 사야겠어. 관중을 단숨에 압도해 버릴 카리스마 강한 놈으로.“ 빌은 더블린 동물원에 연락해 동물사육사를 죽인 적 있는 악명 높은 사자를 자기가 사겠다고 한다. 처음에는 완고하게 거절하던 동물원 측도 그의 고집스러운 요청에 결국 사자를 넘겨준다. 겨울은 서커스단에게 혹독한 비수기다. 더욱이 더운 대륙에서 온 동물들에게 아일랜드의 춥고 햇빛 없는 겨울은 생존을 건 싸움을 의미했다. 빌이 소속된 퍼세트 서커스단은 마가렛 성당터를 피신처 삼아 겨울을 났다. 빌은 자신의 사자들도 그곳에 함께 두었다. 서커스단의 경험 많은 조련사들은 빌에게 새로 데려온 사자 ‘파샤’의 우리 안으로 들어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들에게 먼저 알려줄 것을 요청했다. 퍼세트 서커스단의 소유주였던 헤르타 퍼세트는 아이리시 서커스 역사에서 전설 같은 인물이지만, 당시에는 결혼을 곧 앞둔 젊은 예비신부였다. 빌은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할 때 입으려고 새 양복을 장만했다. 미국 진출을 꿈꾸던 빌은 미국 서커스 인력채용 회사에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마침내 회사로부터 “직접 실력을 보고 결정하고 싶다“는 답장을 받는다. 드디어 미국의 채용 회사에서 빌의 서커스단을 방문한 날, 인사담당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던 빌은 새 양복을 차려입고 손님들을 맞았다. 그리고 조련사들의 경고를 무시한 채 혼자 ‘파샤’의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특기인 ‘사자 입 안에 머리 넣기‘ 묘기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파샤의 입을 벌리고 머리를 입안으로 밀어 넣는 순간 파샤가 흥분하며 날카로운 이로 빌을 공격했다. 그의 새 양복에서 파샤가 기억하는 빌의 냄새가 아닌 낯선 냄새가 났던 것이다. 빌은 응급처치를 할 기회마저 놓친 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그때 빌의 나이 겨우 29세였다. 이 슬프고도 끔찍한 비극은 한동안 신문 지면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서서히 잊혀갔지만, 그의 심장 떨리는 묘기를 사랑했던 서커스팬들과 대낮의 페어뷰 사건을 목격했던 어린 학생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인물로 각인되었다. 물론 그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는 늘 깊은 애도와 그리움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2015년, 빌 스테판의 삶을 담은 조 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Fortune’s Wheel>이 더블린의 한 영화관에서 개봉된다. 그때 나는 존과 커다란 기대 없이 그저 약간의 호기심으로 그 영화를 보러 갔었다. 그런데 왠 걸, 영화를 보고 난 후 몇 날 며칠을 나는 영화가 남긴 독특한 잔향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페어뷰에서 나고 자란 조 리(Joe Lee) 감독은 어느 날 마리노 도서관에 열린 ‘동네역사 강의’에서 빌 스테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야망 큰 청년의 짧고 강렬했던 삶에 큰 매력을 느껴 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빌의 조카인 로레인 케네디가 보관해온 자료들과 생생한 증언의 도움을 받아 제작된 이 영화 속에는 빌과 동시대를 살았던(이제 모두 80세가 넘은) 페어뷰 주민들의 인터뷰가 담겨 있는데, 그들이 들려주는 꾸밈없는 기억의 파편들이 그 어떤 뛰어난 연기보다 더 커다란 감동과 재미를 준다.


1950년대 초 더블린의 겨울을 상상해 본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 세계가 가난과 절망으로 고통 받던 시절.

그리고 유럽에서도 참 가난했던 나라 아일랜드. 날씨까지도 춥고 쓰라린 겨울을 사람들은 어떤 희망을 가지고 버텨냈을까?

서커스! 삶에 지친 사람들이 잠시라도 현실을 잊고 웃고 환호할 수 있는 환상의 세계. 하루하루 먹고 살 걱정만 하며 늙어가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을 20대 뜨거운 청춘에게 맹수를 길들이는 조련사의 삶은 목숨을 걸고 도전해 볼 만한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더블린 베이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길을 걷고 있던 사람들이 달려오는 사자를 마주했을 순간, 막 영화관에서 사자와 사냥꾼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나온 아이들이 눈앞에서 사자와 조련사가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을 순간, 그리고 20대의 빌 스테판이 자신이 죽을 줄 모르고 사자의 입속에 머리를 집어넣었을 순간.

이제 나는 어제와 비슷한 오늘을 살고 있는 내가 어쩌면 내일, 어쩌면 오늘 밤, 어쩌면 이 글을 끝내자마자 마주칠 지도 모를 기묘하고 특별한 순간을 상상해 본다. 복권 당첨처럼 황홀하든 비극적 죽음처럼 고통스럽든, 나의 의지나 선택 너머에 있는 어떤 삶의 순간들에 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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