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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Feb 01. 2020

보이지 않는 옳은 것들의 힘

영화 <히든 라이프> 주인공의 값진 신념


설날 연휴의 끝날이었다. 민족의 명절이라지만 아일랜드에 사는 나에게는 그저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들이었다. 설날이었던 어제는 떡국이라도 끓여 먹으며 명절 분위기를 낼까 했다가, 결국 요리하기 귀찮아 냉동실에서 꺼내놓은 현미가래떡을 찜기에 쪄서 간식으로 싸가지고 나왔다. 그래도 설날이고 토요일인데 남편까지 출근하고 없으니 어쩐지 쓸쓸했다. 나는 혼자 영화를 보며 명절 기분을 내기로 결정하고, 스미스필드에 있는 라이트하우스 영화관으로 향했다. 마침 찜해 두었던 영화 <히든 라이프>(Hidden Life)가 1시간 뒤 상영이었다. 세계2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의 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히틀러의 저항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라 했다.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이라 졸지 않고 완주할 수 있을지 부담은 되었지만, 하루 한 번 매번 다른 시간에 상영하기 때문에 또 언제 보러 올 수 있을지 미지수. 이런 영화는 기회가 될 때 봐두어야 한다.

영화는 3시간의 긴 상영시간 동안 쓸데없다 느껴지는 장면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촘촘했다. 롱 시퀀스가 많고 사건의 전개가 정적이라 초반에 살짝 졸기는 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기 시작하면서 이 낯선 이의 인생 속으로 점점 몰입해 들어갔다. 그런데 이야기가 전개 될수록 어쩐지 좀 이상했다. ‘히든 라이프‘라고 해서 비밀스러운 역할을 맡아 역사적으로 큰 변화를 이뤄낸 평범한 영웅의 이야기인가 했던 나의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다. 히든 라이프. 이건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빛도 이름도 없이 ‘감추어진’ 인생을 살아간 민초의 이야기가 아닌가! 영화는 보통의 휴먼전쟁영화처럼 드라마틱한 반전이나 강한 휴머니즘을 통해 감동을 끌어내려는 노력 없이,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과 싸우는 한 남자의 고뇌를 묵묵히 좇는다.

그는 오스트리아 시골에서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젊은 농부다. 어느 날 히틀러의 군대가 들어와 젊은 남자들을 모두 징집해간다. 입대하기 전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한다. 그런데 모두가 “하이, 히틀러!“를 외칠 때 그는 침묵한다. 당연히 일말의 여지도 없이 그 자리에서 수용소로 끌려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군인들의 비인간적 멸시와 학대로 죽기 직전까지 간다. 그래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최소한 군용 재판에서 풀려날 기회도 여러 번 있었다. 지금에라도 사과하고 히틀러의 사상을 찬성한다고 말하면 다시 가족들 품으로 보내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딱 이 한 마디만 한다. “하지만 옳지 않은 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는 울부짖는 아내와 어린 세 딸을 남겨두고 단두대에 선다...

오스트리아의 눈부시게 깨끗한 하늘, 그림처럼 아름다운 초록빛 산과 들판, 철모르고 뛰어 노는 어린 딸들의 모습이 한 장면, 한 장면, 지나갈 때마다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왔다. ‘그래, 당신의 신념은 알겠는데,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하라고? 거짓말 한 번 한다고 믿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대해서는 신도 이해해 주시지 않겠어?‘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내 안에서도 그냥 신념 한 번 꺾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과 그가 끝까지 신념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충돌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남자가 “죽음을 감당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며 단두대에 서는 순간, 죽음도 꺾지못한 그가 신념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힘없는 인생의 신념 하나가 이토록 고귀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영화를 보고 나와 회색구름이 낮게 깔린 더블린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당신이 목숨을 걸고 선과 정의를 추구한다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그냥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세상은 끊임없이 속삭인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을지라도, 옳은 것을 지켜내려는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의 땀과 눈물이 결국 세상을 살 만한 곳, 꿈꿀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리라.

그리고 내가 걷는 이 걸음 걸음이 옳은 곳을 향해 있기를,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저마다의 빛으로 우주를 아름답게 이루고 있는 별들처럼, 내 인생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몫을 다하며 늘 빛을 잃지 않고 반짝이기를 기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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