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속에 찾은 기적의 마을 ‘녹(Knock)‘
날씨가 조금 풀리는가 싶더니 폭풍우가 지나간 뒤 기온이 뚝 떨어졌다. 아침마다 차가 희뿌윰한 서리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우리는 플라스틱 물병에 따뜻한 물을 받아가지고 나와 성수를 뿌리듯 차의 앞 유리 이쪽저쪽에 뿌려댔다. 그때서야 시야가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 막 2월이 시작된 아일랜드. 나의 일상은 무심하게 흐르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나는 오리처럼 수면 아래에서 보이지 않게 두 발을 허우적거리며 매일 작은 우울의 징후들과 싸우고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이제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찾아왔다. 아마도 아일랜드에 대한 책을 출간하고 나서 찾아온 후유증 같았다. 아일랜드에 대한 수많은 글을 쓰고, 빼고 더하고, 수정하고, 수정하고, 또 수정하는 과정을 몇 년에 걸쳐 끝내고 나니 거짓말 안 보태고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아일랜드에 대한 글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았다. 아일랜드의 비도 바람도 지겨웠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을 잔뜩 고백하고 뒤돌아서니 사랑이 식어버린 기분. 당황스럽고 민망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아일랜드를 떠나고 싶은 것 같다. “존, 나 기적이 필요해.” 뜬금없이 던진 말에 존이 냉큼 대답했다. “나도 필요해. 이 뱃살 좀 단번에 없앨 수 없을까!” “농담 아닌데... 나 요즘 진짜 너무 힘들어. 우리 다른 나라에서 좀 살아보면 안 될까? 일 년 내내 비바람이랑 싸우는 거 너무 힘들어... 그나저나 나 책은 계속 쓸 수 있는 걸까? 책 한 권으로 자원도 에너지도 다 바닥난 것 같아.” “흠... 우리 녹에 가볼까? 혹시 알아? 우리도 녹의 기적을 우리도 만나게 될 지...!” 녹이라... 사실 언젠가 녹에 한 번 가보자고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나였다. 카운티 마요의 녹에서 일어난 기적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환영(Apparitions)>을 본 후, 녹이란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벌써 몇 년 전 일이지만 늘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마침 존의 학교 봄방학 기간을 이용해 짧은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우리는 휴가 첫날 녹(Knock)을 향해 차를 몰았다. 카운티 마요(Co.Mayo)에 위치한 녹은 근처에 공항이 있어 국내외 관광객의 유입은 많지만 사실 관광지로서의 매력은 별로 없는 평범한 타운이다. 그런데 특별히 예쁘지도, 볼거리가 많지도 않은 이 동네가 1800년 대 말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879년 8월 21일, 녹의 주민 15명이 동시에 성모마리아와 어린 양 예수의 환영을 보는 일명 ‘녹의 기적’ 사건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기적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녹에 시찰방문단을 보낸다. 그리고 주민인터뷰 및 현장조사 결과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 환영을 본 사람들의 묘사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실을 들어 이 사건을 ‘가톨릭교회의 기적‘으로 공식 등재한다. 이후 마요 카운티는 녹의 중심에 바실리카를 건축하고 바실리카 옆에는 ‘녹의 기적’을 기념한 작은 신사를 짓고, 성단에는 당시의 환영을 재현한 조각상을 세운다. 1976년 오픈한 이 바실리카는 영국과 아일랜드 통틀어 가장 큰 교회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3년 후인 1979년, 당시 교황이던 존 폴 2세가 순례여행 중 녹의 바실리카를 공식 방문하면서 녹은 명실공이 가톨릭교회가 인정한 ‘순례자의 성지’로 이름을 알린다. 더욱 놀라운 것은 녹의 기적이 단지 이날의 환영으로 그치지 않고, 병 고침의 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바실리카를 찾은 후 병이 나았다는 사람들의 간증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그 중 첫 번째 체험자인 매리언은 38세이던 1989년 녹의 바실리카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가 오랜 세월 알아온 다발성 경화증이 그 자리에서 치유되는 기적을 경험했다. 현재 68세인 그녀는 지금도 두 다리로 자유롭게 걸어 다니며 건강한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이유들로 이제 녹은 국내뿐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매년 백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을 불러 모으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가톨릭 문화가 강한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여름휴가를 빌어 단체로 오는 관광객이 주 고객이라, 우리가 찾아간 2월 말의 녹은 명성이 무색하리만큼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대서양에서 발생한 폭풍이 아일랜드의 몸통을 관통하고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람이 여전히 미친 듯 불었고 그 때마다 풍속에 힘이 실린 빗방울이 때리듯 아프게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웅장한 규모의 바실리카마저 강한 비바람과 낮게 깔린 회색 구름의 무게를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는 듯 고단해 보였다. 다행히 바실리카에서 가까운 숙소를 잡은 탓에 흠뻑 젖기 전에 바실리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전 내부로 이어지는 복도를 따라 아이리시 유리공예가가 녹의 기적을 묘사한 그림이 유리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잠깐씩 구름 사이로 해가 얼굴을 내밀 때마다 다사롭게 색색의 빛을 반사해 냈다.
성전 안으로 들어서니 바실리카의 상징인 모자이크 벽화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3년의 보수공사를 끝내고 2016년 재개관할 때 새롭게 설치된 작품이다. 이탈리아, 이스라엘, 미국 등 세계 각국의 유명한 공예가들이 이탈리아의 스틸림베르고에 모여 9개월 동안 150만 개가 넘는 유리와 대리석 조각을 일일이 손으로 붙여서 완성한 작품이다. 흰 옷을 입은 성모마리아와 성자 요셉, 세례요한, 예수를 상징하는 어린 양, 제단 위 십자가, 그 곁의 천사들까지 성스러운 빛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빛은 두 손을 모으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과 옷까지 물들일 듯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바람이 우는 소리와 존과 나의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성전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벽화의 황금빛이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바실리카를 나와 성상이 있는 채플로 갔다. 같은 모습의 마리아와 어린 양, 성자들이 이번에는 조각상으로 제단 위에 서 있었다. 긴 의자가 10줄 정도 놓인 작은 채플을 압도할 만큼 커다란 크기라 처음에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는데, 막상 의자에 앉아 바라보고 있자니, 누군가와 가까이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졌다. 잠시 내 옆에 앉아 있던 존이 일어나 나가기에 나도 따라 일어날까 하는데 왠지 더 앉아 있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기적이 일어난 곳에 왔으니 나도 무언가 기적을 기대하며 기도하고 싶었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만성 어깨통증을 낫게 해달라고 할까, 첫 책이 대박 나고 두 번째 책도 술술 풀리게 해달라고 할까, 통장 잔고가 좀 넉넉해지게 해달라고 할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류의 간구는 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은 ‘매 순간,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게 해주세요. 이미 넘치게 받았으니 제가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한국의 가족들 건강을 지켜주세요.‘라는 기도였다. 단순한 기도였지만 얼마나 진심이었던지 가슴 깊은 곳이 찌릿찌릿하더니 눈물이 주룩 흘렀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가슴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불평과 원망, 불안과 두려움의 찌꺼기들이 하수구로 배출된 것처럼.
그날 저녁은 숙소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먹었다. 폭우 경보가 여전히 발효 중인데다 월요일 저녁이라 문을 연 음식점이 없었다. 카페트에서 먼지 냄새가 날 것 같은 낡은 호텔이었는데 그런 분위기와 달리 가격이 사악했지만(아마도 성수기 단체관광객이 몰릴 때의 가격을 유지하는 듯)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채식요리가 메뉴에 없어 주방에 특별히 부탁했는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스위트사우어 소스를 아주 듬뿍 넣은 야채덮밥이 나왔다. 15유로가 아까워 꾸역꾸역 먹었는데도 반이나 남겼다. 그래도 이상하게 불평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다. (처음부터) 김빠진 버드와이저로 존과 휴가 첫날을 기념하는 건배를 했다. 바람은 시끄럽고 거리는 너무나 조용한 기적의 동네에서, 이상야릇한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