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장 연극 <The Noble Call>을 보고
아빠가 많이 보고 싶고 생각나는 3월이다. 아빠가 하늘나라로 가신 달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일랜드에 살아서 때 맞춰 못가보지만, 올해는 그마저 한국에 있는 가족들마저도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모이지 못할 테니 이번 아빠 기일은 각자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지나가게 될 듯하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 알고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관계가 복잡다단하지만 아버지와 딸의 관계만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혈연으로는 가장 가깝지만 남보다 못하게 지낼 수도 있는 관계가 바로 부녀간 아닌가. 나는 아빠와 그리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원수처럼 으르렁대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가능하면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 그래야 보통의 가족 형태와 평화가 유지되는 그런 사이였다. IMF로 인한 조기 퇴직 후 알콜의존증이 심해졌고, 그로 인한 분노조절 장애는 가족 모두를 참 힘들게 했다. “나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라며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참 외롭고 불쌍한 남자였다. 그래도 어릴 때는 정답고 애틋한 순간들이 꽤 많았다. 첫째가 딸이라 둘째는 남자아이이길 간절히 원했다가 내가 태어나는 바람에 아빠의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한테 남자 이름을 붙여주고 셋째까지 시도한 결과 남자아이를 얻었으니 내 죄는 다 씻은 셈이었다. 오히려 삼남매 중 내가 애교가 제일 많은 편이라 아빠가 나를 꽤 예뻐하셨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아빠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손가락 크림빵이나 리본 페스트리를 사가지고 집에 오는 날이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꼭 그 크림빵을 한 입 베어물고 자곤 했다. 알싸한 술 냄새를 풍기며 나에게 빳빳한 종이가방을 건네주던 아빠. 난 그 종이가방을 만질 때 나는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그렇게 좋았다. 그리고 빵 안을 들여다 볼 때 훅 끼쳐오던 고소한 빵 냄새. 아빠에 대한 다른 기억들도 많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이 작고 작은 일상의 풍경 한 조각이 가장 따듯하고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
지난 2월 말,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그린 연극을 한편 보았다. 뷰리즈 소극장에서 하는 런치타임 연극시리즈로 제목은 <노블 콜(The Nobel Call)>. 폐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늙은 아버지와 큰 딸의 이야기로,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숨겨왔던 가족사의 비밀이 밝혀지고 그로 인해 갈등하고 화해하는 부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딱 2명의 배우가 등장하고 무대 배경도 요양원 병실이 전부인 소품이지만 워낙 두 배우의 연기력이 뛰어나고 극본의 짜임새가 촘촘해 여느 공연 못지않게 깊은 울림을 준다.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아버지를 매일 찾아가 안부를 묻고 간식을 챙기는 큰 딸 모나(Noni Stepleton 분), 그런 모나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고집을 부리지만 마음만은 깊고 따뜻한 아버지(Vinnie McCabe 분). 그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은 힘들지만 진솔한 대화를 통해 그 원하는 방식의 장례를 함께 준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모나는 아버지의 방을 정리하다가 오래 된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엄마가 모나를 임신했을 때 찍은 젊은 시절 사진이다. 그런데 그 사진 속에서 엄마와 함께 웃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닌 낯선 남자! 다음날 병실을 찾은 모나는 사진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사진 속 남자가 누구냐고 묻는다. 그러자 아버지는 얼굴에 당황한 빛을 보이며 자신의 친한 친구고 엄마와도 잘 아는 사이였는데 일찍 서둘러 대화를 끝낸다. 하지만 사진에 남겨진 날짜와 자신의 생일 사이, 뭔가 미심쩍은 냄새를 맡은 모나는 사진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달라고 아버지를 조르기 시작하고, 이리저리 에둘러 피해가려던 아버지는 결국 충격적인 사실을 모나에게 털어놓는다. “사진속의 남자가 네 진짜 아버지란다. 그런데 너를 임신한 엄마와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 너의 엄마는...정말 많이 힘들어했지. 우린 모두 친구였지만 나는 늘 네 엄마를 깊이 사랑했단다. 그래서 청혼을 했어. 그리고 네가 태어나기 전 결혼식을 올렸지...” 모나는 평생 진실을 숨겨온 아버지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자신이 묻지 않았으면 그냥 무덤까지 가지고 갈 거였냐며 소리 높여 화를 낸다. “사실 유서에 다 써 놨는데 네가 자꾸 묻는 바람에... 하지만 정말 숨기려던 건 아니야. 말을 못한 것뿐이야. 말했다가 널 잃게 될까봐 두려워서. 나에게 넌 늘 내 진짜 딸이었어.”
아빠는 수목장을 원하셨다. 늘 자연이 좋다고 하시더니, 죽어서도 나무와 함께 산에 있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아빠의 재를 묻은 곳에 아빠가 가장 좋아했던 소나무를 심었다. 파킨슨병을 앓던 아빠는 뇌진탕으로 수술을 받으신 후 의식 없는 상태로 1년 반을 병원에 누워 있다 돌아가셨다. 표현을 못하셨기 때문에 아빠와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아빠가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이상 느끼실 수 있으리라, 정신 너머의 영과 소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한국에 갈 때마다 매일 병원에 가서 아빠한테 얘기를 했다. 서운했던 일, 용서를 구하고 싶은 일, 행복했던 기억, 하고 싶었던 말 모두 다 했다.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드렸다. 아빠는 그때마다 아기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마치 그런 단어는 처음 들어본다는 듯했다. 모든 분노가 빠져나간 아빠의 얼굴은 순진무구하고 맑았다. 아빠의 5번째 기일. 요즘 전 세계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코로나바이러스지만, 이 날은 바이러스보다 아빠를 좀 더 많이 생각하며 보내고 싶다. 아빠가 좋아하던 식으로 라면을 한 번 끓여 먹어볼까. 라면 반개에 스프 3분의 1, 면은 부드럽게 끊어지게 조금 오래 끓여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