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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May 06. 2020

뜻밖에 찾아온 음악 세계의 초대장

사랑하는 사람의 세계를 공유하는 기쁨에 대하여


“남편은 무슨 일 해?” “뮤지션.” “우와, 진짜 멋있다!” 내가 아이리시 남자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친구들은 그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 했다. 그리고 내가 ‘뮤지션‘이라고 대답하면 대부분 이렇게 감탄사가 섞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다. 세상에서 ‘낭만’으로 인식되는 주제가 내 삶의 일부가 되었을 때 일어나는 변수들에 대해서. 우리는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만났다. 무대에서 전자기타를 연주하는 존을 처음 봤을 때 꽤 멋지다고 생각했다. 잠시 가슴이 뛰었던 건 아마도 그의 현란한 손놀림을 따라 스피커로 뿜어 나오는 전자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그런 록스타 같은 모습에 반할 만큼 어리지 않았다. 물론 그도 록스타를 꿈꿀 만큼 젊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그가 뮤지션이면서 요리사라는 점에 더 끌렸다. 하지만 막상 우리의 관계를 이어준 것은 음악도 요리도 아닌, '가족 관계의 상처'와 '방랑벽'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약 1년6개월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우리는 존이 혼자 살고 있던 더블린 근교의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즉 가구를 비롯한 모든 사물이 그의 취향과 생활방식에 적합하게 세팅되어 있는 공간에 이민가방 한 개 분량의 내 개인물품과 몸뚱어리만 들어가 살게 된 것이다. 특별히 집안 꾸미기에 관심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신혼살림은 내 마음에 드는 것으로 장만하고 싶었는데, 망했다. 다행히 내 옷가지를 넣을 서랍장과 청소기, 빨래걸이 등 당장 필요한 물건들을 사느라 정신없는 사이 아쉬움은 소리 없이 묻혔다. 대부분의 신혼부부들처럼 우리도 결혼 초에는 많이 싸웠다. 성격 차이, 사고방식의 차이에 국제커플 단골메뉴인 언어 차이, 문화 차이가 더해져 싸울 이유가 끝없이 생겼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세월을 같이 해온 부부들이 그렇듯 우리도 각자의 고집을 포기하고 맞춰나가며 서서히 평화로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나도 나를 여전히 힘들게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음악에 대한 남편의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일이었다. 이미 비슷하게 생긴 기타가 10개나 거실에 줄줄이 놓여 있는데 왜 또 새로운 기타를 보면 눈을 빛내는지, 평소 더 없이 다정하고 친절하던 사람이 왜 내가 실수로 기타를 넘어뜨렸을 때 아연질색하며 목소리를 높이는지 이해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일단 거실에서 스피커를 높이고 음악을 듣거나 기타 연주를 시작하면 남편은 시간도 사람도 잊었다. 마치 그가 음악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 문이 닫히고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빗장이 걸리는 느낌이었다. 가장 힘든 것은 그와 함께 있으나 심리적으로는 부재한 주말을 보내는 일이었다. 그가 공연하는 이벤트 장소에 따라가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그의 공연을 보며 혼자 맥주를 홀짝이고 있으면 설명하기 힘든 쓸쓸함과 고립감이 덮쳐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존이 무심하게 물었다. “제임스랑 나랑 같이 연주할래?” 나는 당연히 농담이라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어어, 농담 아닌데? 우리 밴드에 퍼커셔니스타가 없잖아. 생각해 보니 네가 바우런이랑 간단한 타악기만 보태도 공연이 더 풍부해질 것 같아! 무엇보다 우리가 음악을 함께 할 수 있잖아?”

나에게는 존이 몇 해 전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바우런이 있었다. 바우런은 아일랜드의 전통북으로 한 손으로 북의 뒷면을 받치고 다른 손에 채를 잡고 앞면을 두드려 소리를 낸다. 현란한 기술은 구사 못해도 기본적인 주법은 연주할 줄 알았다. 그래도 그렇지 스쿨밴드도 아니고 진짜 무대에 서야 하는 프로밴드에 나 같은 아마추어가?  

그런데 이상하게 ‘음악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이 심장에 꽂혔다. 하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다른 모든 것은 함께할 수 있어도 음악만은 내가 침범할 수 없는 그의 세계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뜻밖의 순간, 어쩌면 마음 깊이 원했던 초대장이 내 손에 쥐어 있었다. 그 주부터 나는 혼자 유튜브 영상을 보며 바우런을 연습했다. 존과 함께 악기 가게에 가서 청량한 공기돌 소리가 나는 타악기도 사고 주말에 공연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다니며 영업도 뛰었다. 얼마 후 더블린에 있는 ‘케네디즈(Kennedy’s)’라는 펍에서 일요일마다 공연을 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공연 전날 우리는 리드싱어인 제임스의 집에서 리허설을 하며 마지막 호흡을 맞췄다.

케네디즈에서 연주하는 첫 번째 일요일. 바우런 채를 잡은 오른손이 긴장해 몇 번 박자를 놓치긴 했지만 공연은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주었다. 1시간 반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빠른 비트의 발라드곡을 마지막으로 공연을 마치고 났을 때, 양 손목이 얼얼하고 뒷목은 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의 긴 숨을 내쉬는데 존이 “잘했어!” 하며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제임스도 빙그레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난 몇 년 간 나를 힘들게 했던 고립감, 서운함, 외로움이 묵은 체증 내리듯 사라지고, 그 자리가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고 포근한 기운이 흘러들었다. 드디어, 나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소중한 세계 안에 함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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