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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May 24. 2020

펍 없는 아일랜드를 상상할 수 있니?

5월 20일 : 펍이 사라진 아일랜드를 애도하며

Dear diary. 아일랜드에는 이번 주 월요일부터 락다운 완화조치 1단계가 시작되었어. 이동제한 거리가 2km에서 5km로 늘어나고 스타벅스를 비롯한 브랜드 카페와 규모 있는 레스토랑들도 테이크아웃을 조건으로 다시 영업을 시작했어. 약간의 변화가 허락되었을 뿐이지만 사람들이 체감하는 자유의 온도는 따뜻해진 날씨만큼이나 급상승한 분위기야. 도넛가게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고 많은 사람들이 공원이나 바닷가에 삼삼오오 모여 햇빛을 즐기고 있더라. 도로에 차도 훨씬 많아졌고. 갑자기 느슨해진 분위기 때문에 겨우 잡힌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시 퍼질 것에 대한 우려도 없지 않지만, 아일랜드 사람들 특유의 느긋함과 즉흥적인 행동방식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겠어? 당연히 마스크도 쓰지 않고 마음껏 돌아다니는 여기 사람들을 보면 한국에 있는 내 친구들은 기절하겠지. 마스크를 둘러싼 다양한 논쟁 사이에서 존과 나는 우리 나름의 기준으로 타협했어. 야외에 나갈 때는 쓰지 않고 슈퍼마켓에 갈 때만 쓰는 걸로.

예상대로 펍은 1차 완화조치에서 언급되지 않았어. 2주 뒤에 실시될 2차 완화조치에도 펍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 한 달 후쯤 “음식을 판매하는 펍에 한해 테이블 사이 거리두기를 시행하면서 영업을 재개”하는 가능성을 언급하는 정도가 다야. 물론 바에 있는 스툴에 앉거나 서서 맥주를 마시는 것은 더 이상 할 수 없어. 아이리시펍의 매력은 사실 그렇게 바에 촘촘히 앉아 또는 펍 중간 중간에 서서 맥주를 마시는 건데, 그것을 할 수 없다면 일반 레스토랑과 다를 게 없어지는 거야. 한 마디로 앙꼬 없는 찐빵이 되는 거지. 그나마 언급된 것처럼 ‘음식을 파는 펍’은 최소한 영업을 재개할 수 있다고 해도 나머지 음식을 팔지 않는 펍들은 언제 다시 문을 열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거야. 게다가 ‘술만 파는 펍’의 대부분이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간직한, 아일랜드의 상징적인 펍들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지.

쿨리에 있는 존의 펍 ‘릴리피네건’도 바로 그런 펍 중 하나야. 20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며 마을공동체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이 작은 시골펍이 코로나로 문을 닫아야 했을 때 주민들의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어. 릴리피네건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이제 우리는 어디 가서 기네스를 마시냐”는 한탄의 댓글이 줄을 이었지. 2주 후 릴리피네건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쿨리친구 키아란의 생일파티도 취소되었어. 우리 밴드가 하기로 한 축하공연도 자연히 무산되었고. 한두 달만 참고 기다리면 코로나가 잠잠해질 테니 그때 늦은 생일파티를 성대하게 하자 했지만, 5월 말로 향하는 현재까지도 우리가 릴리피네건에서 모일 수 있는 가능성은 희미할 뿐이야. 존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릴리피네건이 정적 속에 홀로 외롭게 서 있을 생각을 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파. 너도 알다시피 나는 술을 잘 못 마셔. 맥주 한 잔에도 얼굴이 군고구마가 되고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하는 걸. 술 잘 마시고 좋아했던 아빠가 아니라 술이라면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엄마 닮아서 그렇지. 태생이 이러니 자연스럽게 잘 안 마시게 되고, 취기에 놀아야 재미있는 시끄러운 술자리도 자연스럽게 저어하게 되더라. 한때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그건 술 마신 다음날이면 쌩쌩해졌던 젊은 시절 얘기고. 어쨌든 나는 술이랑 별로 안 친하고 아빠가 음주로 인한 뇌손상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후로 술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을 정도지만, 코로나 사태로 모든 아이리시펍이 문을 닫은 요즘에는 늦은 밤 펍에서 흘러나오던 불빛과 라이브음악, 시큼한 맥주 냄새와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너무나 그리워. 아마도 펍에서 마시던 술보다 그곳에서 나누던 사람들과의 교감이 그리운 것이겠지. "아일랜드 사람들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고 늘 한소리 했었지만, 펍이 사라진 아일랜드라니 상상할 수도 없어. 유리잔을 소리 나게 부딪쳐야, 침을 튀겨가며 ‘슬론차!’를 외쳐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야, 옆에 선 이의 체온이 느껴져야 비로소 아이리시펍이라 할 수 있는 걸! 사회적 거리두기로 정체성을 잃은 펍들이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자꾸만 마음이 가라앉는 오늘, 유난히 맥주가 땡기는 날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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