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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May 28. 2020

'여름'이라 쓰고 '희망'이라 읽기

5월 24일 : 코로나 이후 더블린과의 첫 재회

Dear diary.


해가 한없이 길어지기 시작했어. 새벽 5시면 벌써 침실 창문으로 아침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잠을 깨우고 오전 7시쯤 아침을 먹으려 식탁에 앉으면 눈이 부셔 블라인드를 내려야 할 정도야. 매일 우산을 가방에 넣고 다니던 습관이 무색하게 요즘은 비도 거의 내리지 않아. 우리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오더니, 이렇게 운신이 자유롭지 못할 때 날씨는 매일매일 눈부시니 참 우습지? 어쩌면 코로나로 인간세상의 시스템이 완전히 재부팅되는 동안 자연세계의 질서도 재창조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 어쨌든 올해는 내가 사랑하는 아일랜드의 여름이 이렇게 조금 빨리 찾아왔고, 5월도 어느새 끝을 향해 가고 있어.



조금씩 늘어나는 이동거리만큼, 그리고 조금씩 늘어나는 해의 길이만큼, 문을 여는 가게들도 점점 더 많아지고 거리로 나오는 사람과 차들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 코로나 바이러스로 나라 전체가 앓던 몸살기운이 차차 가라앉으면서, 사람들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 '뉴 노멀'에 대해 바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어. 각계 전문가부터 일반인들까지 코로나 후에 변할 세상의 모습에 대해 다양한 전망을 내놓고, 각종 미디어와 인터넷 채널을 통해 열띤 토론이 벌이고 있어.

세계적으로 무너진 경제, 교육, 의료 시스템을 복원하는 데 얼마나 걸릴 지 예측할 수 없는 무거운 현실. 하지만 여전히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나는 비록 그 '희망'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의 모습이 아닐지라도, 인간에게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행복의 조건을 창조해 내는 힘이 있다고 믿어. 뉴 노멀(새로운 일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고통스럽더라도 그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나누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게 될 거야. 처참한 전쟁 속에서도 수많은 사랑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처럼.


오늘은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마음이 술렁이기 시작했어. 존과 오후에 더블린에 가기로 했거든! 일반규정에 따르면 브레이에서 더블린까지의 이동거리가 아직 허락되지 않지만, 존의 회사일과 관련된 이동이라 가능했거든. 존의 온라인 수업에 학생으로 참여하고 있는 토니에게 다음주 필요한 수업자료와 교재를 전달하러 가는 거야.

오전에는 함께 대청소를 하고 기분 좋게 깨끗해진 방에서 온라인으로 주일예배를 드렸어. 그리고 병아리콩 스튜 한그릇의 따뜻한 점심을 먹은 후 더블린으로 향했지.



코로나로 락다운된 이후 두 달만의 첫 더블린 나들이! 물론 더블린 시내를 돌아다니지는 못하고 차로 지나가는 것일 뿐이지만, 자주 걷던 길들과 자주 가던 장소들을 다시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 우리는 여정을 즐기며 목적지에 천천히 닿고 싶어 일부러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동네와 동네 사이로 차를 몰았어. 브레이의 옆동네인 샹킬을 지나 칼라이니 언덕으로 올랐고, 굽이진 좁은 도로를 따라 꿈틀거리며 언덕 아래 펼쳐지는 아름다운 바다와 산, 집들을 감상했어.

도키하버에서 잠깐 차를 세우고 '도키섬을 바라보며 심호흡하기'라는 우리만의 의식을 행한 후 해안도로를 따라 던리어리와 블랙락을 지났어. 그리고 더블린 시내로 진입하기 전 마지막으로 풀백요트클럽에 들러 '더블린베이에 정박한 큰 배들 바라보기' 는 두 번째 의식을 행했지.


아직 문을 닫은 상가가 대부분이라 더블린의 분위기는 아직 조용하고 쓸쓸했지만 공원과 거리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어. 적당하게 따뜻하고 기분좋은 햇빛, 하루가 다르게 키가 자라고 푸르름이 짙어지는 나무들이 초여름의 에너지로 빈 자리를 메꿔주고 있었지. 우리가 자주 걷던 길들, 자주 가던 카페와 레스토랑 앞을 지날 때는 시간의 순서가 얽힌 기억들이 팝업창처럼 마구 떠올랐어.

그 사이 우리가 어디쯤 오는지 묻는 토니의 전화가 여러 번 울려서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가는 길을 서둘렀어. 토니가 이웃 사는 자기 누나 집에 있다길래 그곳으로 바로 찾아갔지. 가져온 물건을 토니에게 전해준 후 우리는 오후볕이 눈부시게 내리는 뒷마당에서 우리는 차가운 병맥주를 하나씩 마셨어. 둥근 탁자에 조금씩 간격을 두고 앉아 "이러면 1미터는 지키는 거지?" 따위의 쓸쓸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손이 닿지 않게 병을 부딪쳤지만, 그래도 더없이 좋더라. 락다운 이후 처음으로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맥주를 마시며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 순간이 감동적이기까지 했는 걸.


1시간이 채 안되는 만남이었지만 가슴 가득 훈훈한 기운이 가득차 오르며 사람에 대한 그동안의 허기가 싹 가시는 것 같았어. 집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존이 그러더라. "뭔가 힐링된 것 같지 않아?" 맞아, 하고 나는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어. 토니라는 친구, 그리고 더블린이라는 정든 공간과의 첫 재회. 아일랜드에 막 도착한 여름과 함께 이제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려나 봐. 이제 그 빛나는 여름의 이야기들을 들려줄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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