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5일 : 리버티 빌리지 골목에서 들리던 악다구니를 그리워하며
Dear Diary.
한 도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 연애할 때는 보이지 않던 연인의 단점이 결혼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보이기 시작하듯, 여행할 때는 매력적으로만 보이던 도시가 막상 그곳에서 살기 시작하면 불편하고 불합리한,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부분들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거야. 하지만 연인들이 로맨틱한 감정의 단계를 넘어 책임감과 존재적 이해를 바탕으로 좀 더 깊은 사랑의 단계로 넘어가면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들까지 내가 사랑하는 대상의 일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처럼, 한 도시에서 일상의 희노애락을 경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도시의 못난 부분들까지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고 어떤 그리움의 형태로 마음에 각인되는 거지. 더블린은 나에게 그런 도시야.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미워할 수 없는 도시. 나를 아프고 힘들게 할 때도 있지만 떠나면 못견디게 그리워지는 도시. 내 인생에서 10년이라는 무시못할 세월의 자취가 오롯이 새겨져 있는 도시.
지난 6월 8일 월요일. 아일랜드 전국이 드디어 봉쇄조치 완화 2단계에 접어들었어. 카페, 레스토랑, 옷가게, 인테리어 용품을 파는 가게 등등 대형 쇼핑몰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상업시설이 문을 열고 다시 영업을 시작했지. 하지만 카페든 레스토랑이든 아직 실내에 앉아서 먹거나 마실 수는 없고 테이크어웨이만 허용되고 있어. 참, 몇몇 펍은 입구에서 플라스틱 잔에 생맥주를 담아 팔기도 하더라구!
나는 아직까지 친구들 얼굴을 온라인으로만 보고 있어. 이제 20km까지 이동할 수 있고 10명 이하의 소모임도 허락되었는데 문제는 친구를 만날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거. 날씨 좋은 날 공원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누군가의 집으로 가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아직은 더블린까지 기차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게 조심스러워서 좀 더 나은 때를 기다리고 있어.
오늘은 아침부터 흐리더니 오후로 넘어가면서 비가 오기 시작했어. 그것도 말도 안 되게 우박까지 동반하고선! 정말 아일랜드에서밖에 볼 수 없는 풍경일 거야. 아침 일찍부터 이어진 온라인 회의를 겨우 끝낸 존과 킬라이니 언덕으로 머리를 식이러 갈 참이었는데 이 날씨에 산책은 아무래도 무리, 우리는 즉흥적으로 계획을 바꿔 더블린으로 차를 몰았어. 앞 창유리로 투둑투둑 떨어지는 우박 조각들을 와이퍼로 열심히 밀어내며 느닷없는 여름 날씨의 반항을 즐겼지.
더블린에 도착했을 땐 우박이 가는 빗줄기로 변하고 먹색 구름들이 낮게 하늘을 덮고 있었어. 확실히 거리에 사람도 차도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더라. 날씨가 좋았으면 공원이나 리피강 주변에도 들 자리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을 거야. 존과 나는 차에 탄 채 이 동네 저 동네 구경하기로 했어. 얼마 전 토니네 집에 가는 길에 둘러봤지만 늘 또 생각나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들을 포인트로 2층이 개방된 관광버스를 타고 낯선 도시를 둘러보듯 그렇게 게으르게 그리운 곳들을 구경했어. 그러다 리버티의 복잡한 시장 거리에 들어섰지.
리버티는 리피강 남쪽 더블린 8구역에 있는데, 주로 더블린의 서민층이 모여사는 오래된 동네야. 더블린의 집 값이 크게 뛰면서 최근에는 언더그라운드 예술가, 젊은 창업가들이 월세가 싼 리버티로 하나 둘 모여들면서 나름 힙한 동네가 되었지. 전통적으로는 리버티 마켓이 유명한데, 실제로 가보면 딱 우리나라 남대문 시장에 들어선 느낌이야. 정말 저걸 살까 싶게 촌스럽고 잡다한 물건들이 즐비하고, 길거리는 지저분하고, 사람들도 좀 거칠고. 그런데 뭐랄까, 마구 살아 있는 느낌? 관광엽서용 더블린이 아니라 하루하루 힘들게 일하며 때로는 악다구니로 살아내야 하는 평범한 더블리너들의 삶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곳이랄까.
그런데 그렇게 생동하던 곳이 코로나로 인해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어. 두꺼운 철문을 내린 가게들이 회색 하늘 아래 잠자고 있는 풍경이 스산하게 느껴질 정도였지. 어쩐지 슬펐어.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존이 크게 소리쳤어.
"으아, 난 정말 이 도시가 좋아! 사랑해, 더블린!"
그 뜬금없는 고백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났어. 그런데 순간, 괜시리 코끝이 찡해지더라. 나도 존과 같은 마음을 느끼고 있었나봐. 종종 '이제 아일랜드 쫌 지겹다, 다른 나라 가서 살자'며 장단을 맞추곤 하지만, 우리가 함께 때론 따로 보낸 수많은 시간의 흔적들이 새겨진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던 거야. 모든 관광객이 가고 싶어하는 예쁘고 멋진 장소가 아니라 못생기고 후미진 골목 뒤편에서 그 사랑을 깨달은 날, 나는 연인의 못난 자아마저 품어내는 사랑의 힘으로 이 도시를 힘껏 사랑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부디 리버티가 빨리 예전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기를, 그래서 리버티마켓에 가득하던 시끄러운 소음도 다시 들을 수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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