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7일: 골웨이와 슬라이고의 재발견
Dear diary.
드디어 휴가야! 그것도 두 달 간의 기나긴 홀리데이. 정확히 말하면 남편의 휴가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의 방식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늘 같은 나의 일상에도 즐거운 변수가 생길 테니 내 마음도 본격적인 휴가모드에 돌입했어. 직업이 교사인 덕분에 월급 받으며 놀 수 있는 여름방학이 두 달. 이만한 행운이 어디 있겠어. 그동안 일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를 모두 보상 받고도 남을, 감사할 일이지.
그리고 오늘, 손꼽아 기다리던 휴가 여행을 시작했어! 골웨이와 슬라이고에서 각각 두 밤씩 자고 금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이야. 주말은 집에서 보내고 다음 주 월요일, 이번에는 더니골과 데리로 다시 5일간의 로드트립을 떠날 계획이야.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히는 바람에 미국 캘리포니아와 멕시코를 여행하려 했던 원대한 계획은 무산됐지만, 더블린과 브레이를 벗어나 조금은 낯선 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 너른 들판과 푸른 바다를 곁을 차로 달리며 싫증날 때까지 감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나고 설렜지.
오후 2시쯤 골웨이 시티에 도착한 우리는 시내의 작은 일본식당에서 따뜻한 덮밥을 점심으로 먹고 숙소를 찾아 짐을 풀었어. 이번에 묵은 숙소는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대학교 뒤편에 있는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였는데 전에는 시내에 있는 숙소에만 묵었던 터라 처음 가보는 거리였지. 1층에는 커피를 직접 로스팅하는 카페 '모카 빈'이 자리잡고 있어서 커피 볶는 냄새가 입구에서부터 진동했어. 골웨이 토박이 브랜드라 더 정감이 가는 그곳에서 우리는 웰컴 드링크로 따뜻하 커피를 마셨지. 신선한 원두로 내린 커피는 구수한 풍미가 가득했어.
완전히 낯선 도시 낯선 나라를 경험할 때 느끼는 경이와 자극과는 달리, 익숙한 도시를 다시 만나는 반가움, 그 익숙함 속에서 낯섬을 발견하는 재미도 또 다른 여행의 묘미인 것 같아. 골웨이는 솔직히 많이 가본 곳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떠났거든. 그런데 처음 머무는 동네에서 어슬렁거리는 것만으로도 느낌이 새로운 거야.
물론 시내에도 가봤지. 버스커들도 종종 눈에 띄고 오가는 사람도 꽤 많았지만 코로나로 받은 타격의 흔적은 감출 수 없었어. 아예 문을 닫은 펍들과 옷가게, 레스토랑도 많았고, 문을 열었다 해도 테이크아웃 위주로 영업하는 곳이 대부부분이었어. 포화의 흔적이 남은 전쟁터를 보는 것 같아 좀 슬프더라.
존과 나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솔트힐과 우리 숙소가 있는 캐슬타운 주변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어. 탁 트인 바다 풍경,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소리가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해주었단다.
둘째 날에는 하루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계속되었어. 수선스런 비바람과 반짝 비추는 햇빛이 숨바꼭질을 하듯 번갈아 얼굴을 내미는 하늘. 점심을 먹고 솔트힐에 가서 바닷가 산책을 하는 중,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세찬 빗줄기에 갇혀 버렸어. "이런 날씨에는 영화관에서 재밌는 영화 한 편 보면 딱인데." 내 말에 존도 맞장구를 쳤지.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고 주차장을 향해 가는데 거짓말처럼 영화관 하나가 짠 하고 눈앞에 나타났어. 우리는 동시에 마주 보며 '바로 이거다!' 했지. 러셀크로가 싸이코로 나오는 무서운 스릴러 영화 <Unhinged>를 보고 나오니 비가 말끔히 개어 있었어. 스페니시 타파스와 리오하 레드와인이 참 잘 어울리는 저녁이었어.
셋째 날 슬라이고 시티에서 보낸 하룻밤은 숙소 덕을 많이 봤어. 작은 중급호텔이었는데 운 좋게 큰 창으로 시내를 가로지르는 가라보그강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제일 전망 좋은 방에서 묵게 된 거야. 폭신한 베개, 빳빳하고 눈처럼 새하얀 시트가 덮인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가 잠을 부르더라. 두어 시간 낮잠으로 여독과 식곤증을 말끔히 씻어내고 우리는 도시 탐험을 시작했지. 호텔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마시며 강을 따라 걸었어. 강 곁으로 뻗어나간 작은 골목마다 특색 있는 가게와 카페, 레스토랑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었어. 그런데 슬라이고가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예뻤던가? 골웨이 만큼은 아니지만 슬라이고도 전에 여러 번 와봤는데 처음 와보는 곳처럼 새로웠어. 골웨이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순간이 있었는데, 어쩌면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커다란 사건이 내 기억 속에서 코로나 이전의 시간을 다른 결, 다른 느낌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버린 게 아닐까? 슬라이고의 첫날 저녁은 매콤한 인도커리와 노란 강황밥으로 며칠 간 빵에 지친 더부룩한 속을 빵 뚫었어.
다음날 아침을 먹고 서퍼들의 바다로 알려진 스트랜드힐로 차를 몰았어. 시내에서 차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스트랜드힐은 파도가 높아 서핑으로 유명한 곳이야. 대신 일반 수영은 금지하고 있어.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을 걸으며 파도 위에 올라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서퍼들의 모습을 구경했어. 도망치는 파도와 잡으려는 서퍼의 밀고 당기는 게임에서 파도를 이긴 서퍼들이 서핑보드 위에서 환호성을 질렀어. 한번도 서핑이나 다이빙 같은 액티비티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문득 그 통쾌한 소리에 나도 그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지더라. 물론 아일랜드의 바다에서는 말고 어딘가 좀더 따뜻한 물에서.
우리는 펍에서 샌드위치와 스프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캐릭온샤논으로 향했어. 원래 슬라이고에서 이틀 자는 것이 계획이었는데 호텔이 하루만 예약이 되어있는 것을 슬라이고에 거의 도착해서야 알았지 뭐야. 헐렁한 내 실수지 뭐. 하지만 그거 알아? 여행 중 뜻하지 않게 계획이 틀어져 선택한 플랜비가 때론 더 좋은 선택이 되기도 한다는 거. 이번에도 그랬어. 캐릭온샤논에 도착하자마자 슬라이고를 일찍 떠나야 하는 것에 대한 서운함은 사라지고, 작은 타운이 주는 소박함과 다정함에 기분이 좋아졌어.
잔잔하고 너른 강가에 정박한 배들 위로 긴 여름해가 뉘엿이 기울고 보슬비가 떨어지기 시작할 때쯤, 우리는 우연히 발견한 중국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어. 난 쌀국수로 만든 채식라멘을 시켰는데 매콤하고 뜨거운 국물이 차가운 칭따오 맥주랑 아주 잘 어울렸지. 작은타운을 흐르는 삶의 속도만큼 우리도 느리고 한가로운 하루를 보내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어. 브레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밤이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