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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Oct 23. 2021

엄마, 우리 또 같이 가요

엄마와 함께한 제주보름살이

"이번에 네가 한국에 오면 할 게 많네. 엄마가 제주한달살이를 꼭 해보고 싶은데 같이 갈 사람이 너밖에 없잖니."

엄마가 제주여행 얘기를 꺼낸 것은 내 한국어교육능력시험 일정하고 존이 한국에 올 수 있는 날짜가 애매하게 떠서 이번에는 한국에 좀 오래 있게 될 것 같다고 엄마한테 막 말하고 난 후였다. 엄마가 아이슬란드, 포르투갈, 뉴욕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제주살이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실은 동의아줌마랑 둘이 제주한달살이 같이 하자고 약속했는데, 동의아줌마 친정엄마가 많이 아프셔서 돌아가실 때까지는 기약이 없게 됐어."

그러니까 친구와 가려다가 희망이 안 보이자 차선책으로 나를 동반자로 택한 것인데, 내가 이번처럼 한국에 오래 머물 기회도, 엄마와 제주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도 자주 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여러 번 생각하지 않고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단, 엄마와 단둘이 보내야 하는 '한달'이란 시간이 나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웠는데 마침 엄마의 병원 예약과 언니의 이삿날 등이 일정에 훼방을 놓더니 한달은 '보름'이 되었고, 나에게는 딱 적당해 보였다.


운전에 손 놓은지 한참 된 엄마와 장롱면허뿐인 나는 차 없이 뚜벅이 여행을 하기로 했다. 엄마는 매일 북한산을 오르내린 덕분에 75세의 나이를 믿지 못할 만큼 정정하셨고 나도 나름 걷는 건 자신있으니 뭐 큰 문제가 있겠나 싶었다.

하지만 제주의 대중교통이 서울처럼 용이하지 않고 제주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섬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 숙소는 서귀포 남쪽 올레길 7코스 중간쯤 있었는데, 동쪽이든 서쪽이든 반대편 제주시든, 어디라도 가려면 편도 1시간 반에서 2시간은 기본이었다.  그나마 버스 한 번에 갈 수 있는 곳이면 괜찮았다. 혹여 중간에 버스를 갈아타야 하면 언제 올 지 모르는 다음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지쳐 콜택시를 부르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주에는 배차간격이 1시간 정도 벌어지는 버스들이 많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첫날 예약한 서귀포 숙소에 도착해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며 환호성을 지르던 기쁨은 며칠 후 '역시 전망보다는 교통의 편리성을 선택해야 했나'라는 의구심으로 변했다.

하지만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엄마와 나는 우리가 머무는 집과 동네 분위기, 장 보러 가는 마트, 자주 이용하게 될 버스노선 등을 조금씩 익혀 나갔고, 새로운 환경이 익숙해지니 마음도 편해지고 주변의 소소한 것들이 정답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건네오는 나즈막한 범섬의 아침인사,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이어지는 낮은 돌담과 감귤밭의 시골스러운 풍경, 이틀에 한번꼴로 생수를 사러 들르는 슈퍼주인의 퉁명스런 말투에도 점점 정이 들었다.

10월 첫날 시작된 엄마와의 제주여행은 10월답지 않게 무더운 날씨 속에서 이어졌다. 엄마나 나나 쌀쌀해질 날씨를 예상하고 가져간 옷들이 대부분이라, 우리는 한두 개의 여름옷을 번갈아 입으며 버텨야 했다. 나갔다 숙소에 돌아오면 땀에 흠뻑 젖은 옷을 벗어 말리기 바빴다.

보름이라는 시간은 한껏 여유를 부리며 느리게 흐르다가 점점 속도를 내 달리더니 피니시 지점에서는 갑자기 차가운 입김을 내쉬며 발을 멈췄다. 제주에서의 마지막날, 뚝 떨어진 기온에 많은 비가 뿌렸고 발이 묶인 엄마는 아까운 하루를 버리게 생겼다며 속상해하셨다. "이제 아쉬워 말고 집에 가라고 정을 떼나 보다"라고도 하셨다. 솔직히 나는 언제고 다시 오면 되지, 하는 생각에 그렇게까지 아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원한 빗줄기가 반가웠고, 서귀포에서 가장 유명한 '유동커피'에 들러 비 오는 거리를 구경하며 커피를 마시는 것도 제주여행의 마무리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엄마는 이번이 엄마 인생의 마지막 제주여행'일 거라 믿고 계셨던 것 같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욕심내어 보고, 걷고, 경험하고 싶으셨던 거다.


돌아보니, 무더운 날씨와 여의치 않은 대중교통 갈아타기 등의 이유로 엄마가 하고 싶었던 것, 가고 싶었던 곳들 중 절반 정도 이룬 것 같다. 그래도 나름 다양한 곳을 다녔고, 다양한 경험을 했다. 엄마와 대화 중 부딪히며 갈등을 빚은 순간도 있었지만 묵히지 않고 금세 풀었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어린시절의 추억, 조금 아픈 기억들까지 마음을 열고 나누었던 따뜻하고 고마운 밤도 있었다.

바로 집 앞에 있어 가장 먼저 걸어본 올레길 7코스, 깎아지른 바위산과 푸른 바다의 절경에 감탄했지만,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은 제주의 돌담과 귤밭, 낮은 지붕의 집들, 소박한 바닷길과 숲길이 번갈아 이어지는 올레길 5코스다. 그리고 언제 가도 일상의 활력이 되는 재래시장. 서귀포 매일올레시장과 서귀포 전통 5일장 구경도 즐거웠다. 심심한 무나물을 메밀전병에 말아 먹는 빙떡과 단팥소를 넣어 찹쌀수수로 빗어낸  동그란 오메기떡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비자림과 사려니숲은 워낙 유명해 한번쯤 가봐야 할 것 같았고, 딱 그만큼 좋았던 것 같다. 한번 가보면 만족하는? 일단 유명세만큼 사람이 너무 많았고, 이어지는 길도 어쩐지 만들어진 느낌이 많이 나서 개인적으로는 한번 가본 것으로 만족한다. 의외로 제주 사람들도 잘 모른다는 한남시험림 탐방이 정말 좋았다. 사려니숲 남단에서 사려니오름까지 오를 수 있는 숲인데, 사전 예약을 통해서면 들어갈 수 있다. 1년에 일반인에게 개방되는 기간이 제한되어 있어서인지 사람의 손을 덜 탄, 좀더 원시림에 가까운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미리 신청하면 숲해설사의 해박한 설명도 들을 수 있다. 나는 꽃이나 나무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도 참 즐거웠다. 식물도 사람처럼,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각기 개성이 다르고 습성이 다르다는 것이 신비로웠다. 무심히 지나쳤던 길가의 꽃과 나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사람이 별로 없어 엄마와 난 온전히 고요하고 평화로운 숲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사려니오름까지 가파르고 좁은 산길은 우리의 가쁜 숨소리로 채워졌고, 가끔씩 이름 모를 산새들이 휘파람을 부르며 힘을 북돋워주었다.

긴 여정을 작정하고 제주행 버스에 올랐는데 중간부터 비가 쏟아져 고생했던 하루. 마침 반팔에 샌들을 신고 나섰다가 오들오들 떨었다. 비 때문에 원도심 산책은 포기해야 했지만 그냥 돌아오기는 아까워 아라리오뮤지엄에 들렀는데 생각보다 전시가 알차고 재미있었다. 엄마와 몸을 녹이기 위해 들어간 스타벅스에서 마신 커피와 대화도 즐거웠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친한 친구의 추천으로 찾아간 <빛의 벙커> 전시와 포도뮤지엄의 케테콜비츠 특별전, 이왈종 미술관에서 본 이왈종 화백의 제주생활 그림들... 코로나 이후 갤러리나 박물관 구경을 전혀 못하고 지낸 나의 마른 감성세포들을 깨워주었다. 고마운 마음이다.

제주에서 돌아온 지도 벌써 일주일. 게으른 여행일기를 이제야 마무리한다.  사이 서귀포의 습하고 더운 기운이 몸에서 빠져나가고, 나는 제법 차가운 서울의 가을 공기에 익숙해지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몸으로 제주를 느끼기만 하면 되었던 시간이 끝나고 다시 해야  것들의 목록들로 하루가 채워진다.

엄마의 짝꿍이 되어드리기 위해 나를 희생하며 떠난 여행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 덕분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을 선물 받았다. 엄마 정말로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우리 또 같이 가요, 어디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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