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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Sep 27. 2021

조카바보의 이별연습기

품안의 조카를 더 큰 세상으로 떠나 보냅니다

저만 조카를 예뻐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저처럼 아이가 없거나 비혼주의로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자식 대신 조카에게  부모같은 애정을 쏟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요즘 사람들, 아이를 적게 나으니 자식만 귀해지는 게 아니라 조카도 귀해지고 있지요. 오죽 하면 '조카바보'라는 말이 나왔을까요.

막 말을 뗀 어린아이가 영롱한 목소리로 '이모~' '고모~'(저의 경우엔 이모)를 부르는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녹아내리고, 조카 좀 봐달라는 형제자매의 도움 요청이 짐스럽기보다 가슴 두근대는 외출이 되곤 하지요.

저에게도 저를 조카바보로 만든 조카 녀석이 있습니다. 이름은 신채환. 세 살 위 언니의 외동아들이에요. 이모, 이모, 부르며 내 뺨에 촉촉한 볼키스를 해주던 녀석이 어느새 올해 나이 16살, 키는 180센티미터 가까이 커 버렸고 변성기를 지나는 목소리에서는 제법 남자 티가 나네요. 채환이는 현재 자기만의 방식으로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남동생의 두 아이도 더없이 사랑스럽지만 저에게 채환이가 유독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이모와 조카들이 쉽게 소유하기 어려운 시간의 기억을 우리는 가지고 있거든요.

채환이가 언니와 함께 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저를 보러 온 것은 2010년. 채환이가 겨우 4살 때였어요. 그때 저는 학생으로 어학연수 중이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도 전이었지요. 그런 어린애를 데리고 어떻게 그 먼데를 가냐는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언니가 아일랜드행을 감행한 것은 제가 어학연수를 마치는대로 한국에 돌아갈 계획이었기 때문이에요. 한 마디로 동생 있을 때 가지 않으면 언제 아일랜드를 가보겠냐는 생각이었지요. 그때만 해도 아일랜드는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으니까요.

언니와 채환이가 머물던 일주일 내내 흐리고 비가 왔더랬죠. 엄마의 우려대로 시차 때문에 낮에 자고 밤에 깨는 채환이 때문에 관광은커녕 한밤중에 일어나 고구마를 삶고 밥을 차리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정말 몰랐지요. 그 후로 채환이가 두 번이나 더 아일랜드에 와서 저와 시간을 보내게 될 줄은요.


다음해 존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2013년에 결혼을 하면서 저는 아일랜드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다음해인 2015년 여름, 채환이가 아일랜드에 왔어요. 9살짜리가 엄마아빠도 없이 혼자 비행기를 타고 말이에요. 물론 항공사의 유소년케어 서비스를 이용하긴 했지만, 혼자 이모를 보겠다고 그 먼 길을 찾아온 녀석이 얼마나 대견하고 사랑스럽던지요.

사실 언니가 어린 채환이를 아일랜드까지 혼자 보내기로 한 데는 가볍지 않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래 4월  즈음 형부가 후두암 판정을 받은 후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받으며 투병 중이었는데 경과가 좋지 않았어요. 형부는 언니의 전적인 보살핌이 필요로 하는 상태가 되었고, 채환이를 돌보면서 형부를 케어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언니는 저와 존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채환이를 방학 동안 대신 좀 돌봐줄 수 있냐고요. 그렇게 채환이와 저의 두 달간의 동거가 시작된 것이지요.


두 달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습니다. 저와 존은 우리끼리 자유롭게 정하던 하루의 일과표를 채환이에 맞춰 다시 짜야 했고, 이모와 이모부 이상 부모의 책임과 역할을 감당해야 했으니까요.

채환이를 영어캠프에 등록시키고 아침에에는 존이, 오후에는 제가 채환이를 픽업했습니다. 채환이가 점심시간에 먹을 샌드위치를 싸는 건  저의 일이었지요. 오후에 채환이가 학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갔다가 존이 일하는 회사 근처 맥도날드에서 존의 퇴근을 함께 기다리곤 했습니다.

퇴근하는 존의 차를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던 일상의 평범한 밤들을 기억합니다. 쉐프로 일하는 존이 일터에서 가져오는 아일랜드 음식들을, 채환이는 참 좋아했습니다. 로스트비프, 닭가슴살구이, 볼로네제 스파게티 등등. 그 중에서도 다진 쇠고기와 야채 위에 으깬 감자를 얹어 구운 셰퍼드파이와 옷을 입혀 오븐에서 바삭하게 구운 닭가슴살요리를 특히 좋아했지요. 맛있다, 최고!를 연발하며 오물오물 야무지게 음식을 먹던 그애의 귀여운 얼굴이 너무나 생생합니다.

주말마다 근교로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레스토랑도 많이 갔습니다. 채환이한테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거든요. 사진도 참 많이 찍었어요. 그때만 해도 하라는대로 포즈를 요리조리 취해 주었지요. 채환이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한동안 그 아이의 빈 자리가 얼마나 허전했는지 모릅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채환이는 한국에 돌아간 후에도 채환이와 저는 종종 영상통화를 했습니다. 존과 저, 채환이 우리 셋은 끊임 없이 아일랜드에 만든 추억을 소환해내며 우리가 함께했던 2개월의 소중하고 특별한 시간을 감사하고 그리워했습니다.


채환이가 세 번째로 아일랜드에 온 것은 이듬해 겨울, 크리스마스 이틀 전입니다. 저의 친언니와 함께였지요.

공항으로 마중 나간 존과 제가 두 사람이 입국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울컥 했던 순간이 생각납니다. 암과 열심히 싸웠던 형부가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해 8월 세상을 떠난 후 힘들어하는 언니를 위해 존과 제가 제안한 초대였습니다. 아일랜드에서 함께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보내며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무게를 덜고 마음의 쉼을 얻기를 기도하는 마음이었지요.

크리스마스는 오붓하게 집에서 보내고 연말에는 아일랜드의 서부로 자동차여행을 떠났습니다. 골웨이의 모어절벽에서 맞은 바람, 콘네마라성의 아름다운 정원 산책, 골웨이시티에서 즐긴 아이리시 전통음식과 라이브음악... 언니는 많이 웃었고, 그새 훌쩍 자란 채환이는 제법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 재잘거렸습니다. 아빠를 잃은 슬픔이 잠시라도 그렇게 푸른 자연에 묻히고, 웃음에 묻히기를 바랐습니다.


언니와 채환이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존과 저도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형부의 몫까지 외벌이를 해야하는 언니, 중학생이 되면서 학교 공부가 바빠진 채환이와 연락을 자주 하기는 어려웠고, 설이나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때에 잠깐씩 소식을 주고받으며 지냈지요.

사실 가장 큰 변화는 채환이었어요. 어느덧 사춘기에 다다른 녀석은 슬슬 말수가 적어지고 자기고집이 세지시 시작했어요. 어른들의 관심은 모두 간섭으로 느껴질 나이, 그런 것이겠죠. 우리가 쌓아올린 특별한 인연도 사춘기의 강력한 회오리를 비켜가진 못했습니다. 채환이는 화면으로 얼굴 보며 이야기하는 것을 어색해했고, 눈을 잘 안 마주치려 했어요. 그래서 그냥 목소리 통화를 할 때도 네, 아니오의 단답형 대답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죠. 존과 저는 말로만 듣던 그 시기가 우리에게도 닥친 것을 실감했습니다. 독립의 갈망이 커지고 또래의 세계가 중요해진 채환이가 우리와 멀어지려 한다는 것을요. 아무리 서운해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잘 자라주기를 멀리서 기도와 사랑으로 응원하며 지켜보는 것으로 우리의 위치를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것을요.

물론 머리로 이해하고 다짐하는 속도로 가슴이 따라와 주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채환이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깔깔거리다가도 갑자기 슬픔이 밀려와 한동안 침묵 속에 빠지기도 하고, 그애가 우리집에 머물 때 그렸던 그림들, 낙서들을 보면서 우리가 누렸던 어린 채환이의 동심을 그리워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그런 마음을 앓지만 예전보다 많이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애를 떠나보내는 연습 중이지요. 채환이는 올해 3 되었고, 지난 8 미국 아이오와로 1 교환학생연수를 갔습니다. 뮤지션인 존이 무대에서 기타 치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기티를 가르쳐달라고 했던 아이. 그때부터 계속 기타를 좋아하며 뮤지션의 꿈을 꾸고 있는 아이. 채환이는 미국 1 교환학생을 마치면 아일랜드에 와서 고등학교를 다닐 계획입니다. 몸도 마음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훌쩍  모습의 그애가 늙어가는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나겠지요. 물론 예전처럼 우리  안에 머물지는 않겠지만, 어른이 되어가는 그애와  다른 빛깔의 추억을 쌓아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렙니다. 채환이가  나이가 되어 과거를 돌아볼 , 그애가 지나온 중요한 인생챕터에 아일랜드의 이모와 삼촌이 미소짓고 있기를. 그것이 저의 소박한 바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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