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쉬 포테이토에 대한 단상
"홈스테이 맘이 맨날 감자 요리만 해줘요. 아침엔 삶아주고, 저녁 땐 으깨주고...아, 이제 지겨워 죽겠어요!"
아일랜드에 처음 왔던 해 같은 어학원에서 공부하던 한국남자애가 했던 말이다. 그땐 그냥 웃고 넘겼는데, 지금 생각하니 정말 어지간히 감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할 법한 불평이었다. 그만큼 아일랜드 사람들은 식탁에 감자가 빠지면 아쉬울 만큼 감자를 많이 먹는다.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음식인 만큼 요리법도 단순하다. 주로 통째로 삶거나(Boiled Potato), 삶은 감자에 버터를 넣어 으깨거나(Mashed Potato), 길죽길죽하게 썰어 튀겨 먹고(이곳 사람들은 Fried potato라 하지 않고 Chips라 부른다.), 가끔 올리브오일을 두른 오븐에 구워 먹기도 한다.
수퍼마켓에 가보면 대부분의 야채와 과일이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 다른 유럽나라에서 건너온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감자만은 대부분 아일랜드가 원산지다. 한국 사람들이 쌀을 포대로 사듯 아일랜드 사람들이 포대로 감자를 사가는 것을 보면, 아일랜드 사람들의 주식은 '빵'이라기보다 '감자'라 하는 게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레스토랑도 마찬가지. 아일랜드에 있는 모든 레스토랑은 그 종류를 막론하고 'Chips'가 메뉴에 없는 곳이 하나도 없다. (혹시 그런 레스토랑을 발견해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기네스를 한잔 사겠다!) 존과 나도 거의 매일 감자를 먹는다. 흔하고 값싸고 요리하기도 간편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흔하고 값싸고 요리하기 편하다는 이유 외에 감자를 자주 먹게 되는 진짜 이유는 바로 '맛'이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감자를 먹어보지 않은 나라가 없는 것 같은데, 아직까지 아이리쉬 감자만큼 맛있는 감자를 맛본 적이 없다. 특히 나처럼 파슬파슬 분이 많이 나는 감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아이리쉬 감자를 처음 맛보는 순간 단번에 사랑하게 되리라.
마땅히 요리할 재료도 없고 요리하기도 귀찮을 때, 심지어 감자 삶는 시간을 기다리기도 싫을 땐 생감자 몇 개를 전자렌지에 몇 분 돌려 버터를 얹어 먹거나 소금만 살짝 뿌려 먹기도 맛있다. 감자가 거의 다 익으면 껍질 이곳저곳이 땅이 갈라지듯 벌어지며 사이사이 하얀 분이 포르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감자가 적당히 익으면 포크로 껍질이 일어난 부분을 살짝 밀어주기만 해도 껍질 전체가 훌렁훌렁 잘 벗겨진다.
한번은 이런 아이리쉬 감자의 특성을 생각 못하고 된장찌개를 만들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호박, 양파, 감자를 넣고 찌개를 끓였는데, 나중에 보니 호박과 양파만 남고 감자는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익는 동안 푸슬푸슬 무너지며 국물 속으로 다 흝어져 버린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감자가 다른 야채에 비해 익는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에 보통 감자를 먼저 넣는데, 이 감자 실종 사건 이후로는 찌개 끓일 때 항상 감자는 좀 크게 썰어 제일 마지막에 넣고 잠깐만 후르르 끓여낸다.
모든 아이리쉬 감자가 분이 많은 건 아니다. 보통 삶아서 껍질째 먹는 베이비 포테이토는 조금 무르고 단맛이 난다. 분이 많은 종자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껍질이 조금 두껍고 보라색이 나는 루스터(Rooster). 그리고 루스터보다 가격이 좀 비싸면서 흔하지 않은 종으로 모양이 아주 동글동글하고 껍질에 핑크빛이 도는 컬스핑크(Kerrs Pink)가 있는데, 이건 정말 포크로 자르려 하면 다 부서져 버릴 정도로 분이 많다. 너무 물기가 없어 목이 메일 정도이다 보니 난 루스터를 선호하지만, 존은 자기 고향 특산품이기도 한 컬스핑크를 최고로 꼽는다. 존을 길러주신 릴리 이모는 이 분 많은 컬스핑크를 'Balls of Flower'라 부르셨단다. 그의 고향 쿨리에 가면 감자농사 짓는 친구들이 있다니, 언젠가 감자 수확철에 내려가 감자 캐며 일당도 벌고 감자도 실컷 먹고 오면 어떨까 생각 중이다.
나는 파삭거리는 아이리쉬 감자를 먹을 때마다 한국에 있는 엄마가 생각난다. 내가 어릴 때 엄마는 종종 간식으로 감자를 쪄주곤 하셨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냄비를 열고 엄마가 가장 먼저 하던 말은 "아, 요번 감자는 파삭파삭하니 맛있겠다!"라거나 "에이, 이번 감자는 너무 물러 틀렸네."였다. 나도 엄마처럼 분 많은 감자를 좋아해서, 그렇게 파삭파삭한 감자를 만나는 날은 엄마와 둘이 식탁에 앉아 두 개고, 세 개고 배가 부를 때까지 먹었다. 그냥 소금만 찍어 먹어도 그렇게 맛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날 저녁 그 감자들로 감자만 잔뜩 넣은 감자고추장찌개를 만들고 다음날 우리들 도시락 반찬으로 당근과 함께 볶아 두기도 하셨다.
종종 이곳에서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할 때 내가 '오늘 파삭파삭한 감자를 먹었다' 얘기하면 엄마는 늘 '아이고, 맛있겠다!' 하신다. 아이리쉬 감자를 꼭 맛보게 해드리고 싶어 작년에 한국 갈 때 캐리어에 루스터 감자 한 봉지를 몰래 넣었다. 농산물 반입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는데(그만큼 간절했다) 그러다 딱 걸려 난생 처음 세관 리스트에 이름 올리고 결국 감자는 빼앗기고 말았다.
내년은 엄마가 칠순이 되시는 해. 아빠 병간호 하시느라 아직 딸이 사는 나라에 와보지 못하셨는데, 이제 아빠 보내시고 자유롭게 되셨으니 내년에는 꼭 비행기표 사서 초대할 생각이다. 엄마 소원이었던 스위스 여행도 함께 해야지. 물론 가장 먼저 할 일은 엄마와 파삭파삭한 아이리쉬 감자를 함께 먹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