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때로 그런 날이 있다. 마음을 좀 잡아보려 어떻게든 애를 써봐도 '비가 온다'는 이유 하나로 좀처럼 가라앉는 마음을 끌어올리기 힘든 날이.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불쑥 눈물이 비어져 나오고, 가벼운 농담 한 마디에도 괜히 서운해 입술을 삐죽거리게 되는, 그런 비 오는 날. 공교롭게도 그런 날 뭔가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잠수 중인 기분을 들켜 불편한 질문 세례를 받거나 분위기 어색하게 만든다는 핀잔을 듣지 않으려면 말이다.
특히 이런 날은 경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향수병(Homesick)'이란 놈을 조심해야 한다. 잊고 지냈던 한국의 친구들, 내가 좋아하던 어떤 장소들과 일상의 편린들이 하나 둘 떠오르면서 갑자기 사무치게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거다. 게다가 종종 '자기연민'이란 놈과 '짜고 치는 고스톱' 행각을 벌이는데,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데 아주 고수다. 그럴 땐 평소 고마운 소통 수단이었던 페이스북마저 이 고스톱 행각에 합류한다. 아기 사진과 비디오로 도배되어 있는 친구의 페북에는 내가 그들이 그립다고 징얼거릴 틈이 없어 보이고, 같은 분야에서 일했던 지인들이 책을 출판했다거나 1인기업 사장이 되어 자기영역을 멋지게 개척해 나가고 있는 소식을 보면 갑자기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면서 기가 팍 죽는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지? 한국에 있었으면 계속 글 쓰면서 돈을 벌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 여전히 영어는 내 맘처럼 입에서 자유롭게 놀지 않아 답답하다. 아직 8월인데 겨울 가디건을 껴입고 다녀야 하는 것도, 옷을 좀 화사하게 입고 싶어도 결국에는 검정 바람막이 점퍼를 꺼내입게 되는 아일랜드의 거칠고 변덕스러운 날씨도 지긋지긋해지는 것이다.
오늘은 한국의 늦여름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한낮에는 여전히 수은주가 높이 솟다가도 저녁 여섯일곱시쯤 돼 해가 질 무렵이면 문득 서늘한 바람이 빰을 스쳐며 가을이 가까웠음을 알려주곤 했지. 그러고 보니 반팔 티셔츠에 슬리퍼 신고 가볍게 돌아다녀 본 게 언제적 일인지. 날씨 때문인지 아일랜드에 온 후로는 그렇게 좋아하던 수박 생각도 별로 나지 않는다. 언젠가 한국의 여름을 다시 만나게 되면 달고 차갑고 아삭거리는 수박이 다시 먹고 싶어질까?
친구들과 끝도 없이 떨던 한국말 수다도 그립다. 지난 봄 스페인에 사는 한국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 우린 매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더랬다. 말을 많이 해서 목이 아파본 게 얼마만이었던지. 단어와 문장을 재정렬해 끄집어내야 하는 뇌의 작용 없이 자유자재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그때 내 모국어가 외국말에 지친 나에게 건네주던 다정한 위로를 잊지 못한다.
이제 10월에 한국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모두들 어제 본 듯 반갑겠지. 하지만 서로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각자 달라진 삶의 모습, 달라진 생각들도 발견하게 되겠지. 이젠 한국에 가도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한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 지하철을 타고 늘 걷던 광화문 사거리를 걸으면서도, 친구를 만나 함께 저녁을 먹을 때도 여행하듯 가슴이 설렌다. 그렇다고 아일랜드가 아직 '내 나라' 같지는 않으니, 이제 이곳에 머물더라도 한국을 가더라도 그저 난 여행자일 뿐. 평생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살고 싶다고 하더니, 진짜 나 이제 어디도 속하지 않은 노마드족이 되려나 보다. 그랬으니 비슷한 생각을 가진 지금의 남편을 만나 철없는 청춘들처럼 늘 어디론가 떠날 생각만 하고 있는 거겠지. 그러려면 좀더 홈씩에 강해져야 한다. 어차피 이 세상에 영원한 '홈'이란 건 없으니까. 이런 잡다한 생각을 하다 창밖을 봤다. 아직도 하염없이 하늘이 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