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쉬 가을 나기

2014년 10월, 한국의 그리운 이들에게 쓴 편지

by Maya Lee

10월의 아일랜드. 이곳은 요즘 가을을 건너뛰고 겨울이 온 것 같습니다. 오늘은 한겨울에 입으려고 장만한 두터운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는데도 쌀쌀하다 느껴졌습니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가나 공원 벤치 주변에는 벌써 낙엽이 소복히 쌓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한국에서처럼 샛노랗고 샛빨간 단풍을 보기 힘듭니다. 아마 비가 많고 햇빛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건조한 바람과 따가운 햇빛 속에서 총천연색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들과 밟을 때마다 '사각' 소리가 나도록 바삭하게 마른 낙엽들을, 아일랜드에 오기 전엔 늘 때가 되면 향유할 수 있는 것인 줄 알았죠. 아일랜드의 낙엽들은 바삭해질 새가 없습니다. 몸 좀 말릴까 싶으면 어김없이 다시 빗물샤워를 하게 되니까요.
그러고 보면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가을의 명칭도 참 한국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다가 드높은 가을하늘 바라보며 기분좋게 되새김질하는 말의 모습을, 아일랜드에서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아, 물론 저의 편협한 생각일 수도 있겠지요. 분명 날씨 좋은 가을날엔 아일랜드의 들녘에서도 그런 말들을 만날 수 있을 테지요. 하지만 제 기억 속 아일랜드의 들판은 해가 나는 날이나 흐린 날이나 늘 바람이 가득합니다. 눈이 부실 만큼 강한 햇살에 속아 벌컥 차 문을 열고 나섰다간 즉각 덥쳐오는 날선 바람에 소름이 오소소 돋고 맙니다. 그러다 햇빛이 쏟아지는 하늘 이웃편에 회색구름이 낮게 깔리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했다면, 다시 부지런히 차를 몰거나 준비해둔 우산이나 비옷을 꺼내는 것이 좋습니다. 곧, 거짓말처럼 비가 쏟아질 것이니까요. 그러다 곧, 다시 거짓말처럼 해가 반짝 비추며 하늘이 미안한 마음에 무지개 한 자락 높이 띄워줄 지도 모릅니다.
이런 변화무쌍함 때문인지 아일랜드의 들판은 저에게 '평화'보다 '자유'란 단어로 다가옵니다. 그런 점에서는 몽골의 들판과 더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나라 전체의 면적이 한국과 비슷하지만 인구는 한국보다 훨씬 적다 보니, 도심만 조금 벗어나면 끝도 없는 들판입니다. 한국처럼 밭 매는 아낙이나 트랙터를 모는 농부도 별로 보이지 않고, 보이는 건 말과 소와 양들뿐이지요. 더구나 이곳에서는 가축을 모두 방목해서 키우기 때문에 축사에 갇혀 사는 한국의 가축들보다 훨씬 자유롭고 행복해 보입니다. 게다가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토양의 질도 좋아 풀 맛도 좋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폭우가 쏟아질 때도 주인이 지붕 밑으로 불러들여 비를 피하게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습니다. 하늘과 맞닿은 들판 끝까지 다 제 것인 양 호기롭게 말이죠. (원래 말들은 다 그런가요?)
한국에 있을 때는 선명하게 가을을 타곤 했습니다. 무더웠던 밤공기의 미세한 변화, 서서히 변해가는 나뭇잎들의 빛깔, 그리고 눈에 띄게 높아지는 하늘... 추운 겨울 끝의 희망이라 봄을 가장 좋아하긴 했지만 늘 가을이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10월은 어김없이 힘들었습니다. 아마도 센치해지는 감정 때문에 생기는 가을앓이였겠지요. 생각이 많아지고 눈물도 많아지고 사람이 그리워지고 동시에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 그저 모든 것이 눈물나게 아름다워 슬픈.
지금 생각하면 아일랜드에서는 특별히 '가을 탄다'는 느낌 없이 가을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여름이 지나간다 싶으면 벌써 전기장판이 생각나기 시작나죠. 온돌방 생활을 하는 한국과 달리 아일랜드의 집들은 기본적으로 으스스하거든요. 그렇게 가는 여름에 대한 아쉬움과 다가오는 겨울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서성이다 보면 어느새 아일랜드의 짧은 가을은 사라져 버리고 말지요. 그렇다고 아일랜드의 가을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일랜드의 날씨에 대해 늘 불평은 해도 아일랜드가 특별히 아름다운 나라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이 있을가요? 비가 자주 오다 보니 심지어 도심에서도 늘 맑게 씻긴 공기를 마실 수 있습니다. 한국처럼 매연이나 황사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큼은 얼마나 좋은지요!
그런데 올 가을은 감정세포들이 유난히 활발히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겨울점퍼에 두꺼운 목도리를 두르고, 카페에 앉아 커피를 호호 불어마시며, 제가 가을을 타네요. 별처럼 무수한 생각들에 잠을 자주 설치고, 작은 일들에도 많이 슬프거나 많이 감동하고, 무엇보다 한국에 계신 엄마가 너무 많이 보고 싶습니다. 아, 어쩌면 한국에 갈 날이 가까워지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주 후면 비행기를 타거든요. 이상하게도 한국에 언제 갈 지 기약이 없을 때보다 비행기티켓을 손에 쥐고 있을 때 그리움이 더 빨리 자라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며칠 전에는 우연히 공원에서 밤나무를 발견했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밤을 안 먹기 때문에 밤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거든요. 아, 근데 밤나무 아래 밤이 잔뜩 떨어져 있는 겁니다. 얼마나 반갑던지요. 생긴 것도 동글동글한 것이 꼭 우리 공주알밤처럼 생겼길래, 주워다 삶아 먹어볼까 하고 얼른 몇 움큼 주워왔지요. 다음날 아침 냄비에 바글바글 삶아서 반을 짝 갈라보니 살이 노랗고 파슬파슬한 것이 아주 맛있어 보였습니다. 기대가 점점 부풀어 갑니다.
"자기야!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봐! 밤이야, 밤!"
존도 불러 옆에 세워놓고 찻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었는데 맛이 좀 썼습니다. 겉보기엔 상한 곳도 없이 멀쩡한 데 말입니다. 다른 녀석을 하나 더 반으로 갈라 다시 한입 넣고 존도 한입 넣어주고는 맛을 음미하려는 순간, 엄청나게 강한 쓴맛이 혀를 쏘아댔습니다. 퇫퇫! 존도 저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뱉어버리고 말았지요. 개수대에서 입까지 헹구어 냈는데도 계속 쓴맛이 나길래 얼른 치약으로 이를 구석구석 닦았습니다. 그런데도 입이 계속 쓴 겁니다. 존은 괜찮다고 하는데, 저는 오히려 목까지 따끔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독성 있는 밤이었나? 밤이 아니라 밤 닮은 이상한 열매인가? 목구멍으로 넘긴 거라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양이니, 설마 독성이 있다하더라도 별일은 없겠지,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나중에는 속까지 미슥미슥거리며 저를 괴롭혔습니다. 다행히 이 해괴한 증상은 그날 오후가 되면서 차차 가라앉아 그냥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덕분에 따뜻하고 달콤한 밤 맛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더욱 커져버리고 말았습니다. 11월에 한국에 가면 꼭 맛있는 밤을 사다가 삶아먹을 작정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가면 반대로 지금 이곳에 있는 무언가가 그리워지겠지요? 고구마와 렌틸을 푹 끓여 로즈마리로 향을 낸 스프나 파슬파슬 분이 많이 나는 아일랜드의 감자 같은 것들이. 무엇보다 두고 가는 남편이 금새 그리워지겠지요. 그러니 그리움을 피해갈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아일랜드에 살기 시작한 이후, 이곳에 있든지 한국에 있든지 또 다른 어떤 나라에 있든지 전 늘 무언가를 끔직히 그리워하며 살게 된 걸요. 그래서 살기 좀 더 힘들어진 것인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리움이 우울이 되지 않고 더 깊은 사랑이 되어 그 그리움의 대상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그렇게 성숙해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펩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