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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Sep 23. 2015

West Cork에서의 사흘밤(2)

'Bantry'에서 발견한 아일랜드의 진짜 매력

아침 6시 알람에 맞춰 눈을 떴다. 지린내 나는 방에서 쿰쿰한 이불을 덮고 잤지만 조용하고 평화로운 밤이었다. 오늘은 3일의 일정 중 가장 설레고 기대되는 날이다. 처음 아이리쉬타임즈에서 웨스트코크 푸드 페스티벌을 발견한 날, 웨스트코크에 올 수 있길 꿈꾸며 이벤트 가이드를 꼼꼼히 읽어내려가다 마음이 멈춰섰던 프로그램, '컬처키친 푸드투어'를 떠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보자마자 형광펜으로 동그라미를 치고 별표까지 해두었지만 95유로라는 만만치 않은 가격 앞에서 여러 번 고민했더랬다. 그러다 떠나기 이틀전 지르기로 마음먹었다. 차 없이 가는 나에게는 '웨스트코크의 숨은 경관과 진짜 로컬푸드의 맛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듯했다. 대신 초과되는 예산을 조금이나마 메꿀 요량으로 햇반과 즉석된장국, 라면을 베낭에 넣었다. 그리고 신문에 나와 있는 휴대폰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한 자리 예약합니다!'

일단 잠을 깰 겸 세수를 간단히 하고, 어제저녁 리버사이트 까페에서 남겨온 키쉬 반쪽과 후무스 랩 반쪽을 아침으로 먹었다. 문득, 처음으로 혼자 베낭을 메고 비행기를 탔던 호주여행 때가 생각났다. 점심을 사먹게 되면 늘 반을 남겨 두었다가 저녁 때 먹곤 했는데, 차갑게 식은 음식이 그리 맛있을 리 없었지만 왠지 그런 내 모습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묘한 만족감이 있었다. 10년 전 그때처럼, 냄새 나는 호스텔 방에서 차게 식은 아침식사를 하며 조금씩 여명에 눈을 뜨는 스키버린 타운을 바라봤다. 가난한 여행자의 낭만...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투어가 출발하는 장소가 반트리의 메인광장이었기에 일단 반트리로 가야했다. 반트리는 스키버린과 함께 웨스트코크의 메인타운 중 하나로, 스키버린에서 서북쪽, 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곳에 있다. 미니버스가 출발한다는 주유소까지는 달랑 걸어서 5분. 10분쯤 일찍 도착해 차가운 아침공기로 샤워를 하며 버스를 기다린다. 잠시 후 하얗고 작은 버스가 멈춰섰다. 동네 아줌마, 동네 할아버지, 동네 총각, 동네 학생들도 몇몇 타고, 우리네 시골버스 같이 정겨운 미니버스가 반트리를 향해 출발했다.

딱 1시간 후, 버스는 반트리 메인광장 앞에 나를 내려놓았다. 아침 9시. 투어는 10시에 바로 맞은 편 소방서 앞에서 출발하니까, 모닝커피 한 잔 마실 시간은 넉넉했다. 타운센터 쪽으로 걷다가 기분 좋은 냄새를 맡고 멈췄 섰다. 막 구워낸 스콘 냄새와 막 갈아낸 커피콩 냄새! 그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는 냄새처럼 맛있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해요!' 너무 행복해서 감사기도가 절로 나오는 아침이다.
어냐. 소방서 앞에서 만난 가이드의 이름이다. 40대 중반쯤 되어보이는 외모에 친절하고 지적인 목소리.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머리스타일과 옷차림에서 보헤미안 분위기가 물씬 났다. 나는 첫눈에 그녀가 좋아졌다. 10분쯤 기다리니 투어를 함께 할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웨스트코크의 또 다른 타운 '스컬'에서 온 메리와 런던에서 놀러온 그녀의 친구 수잔. 반트리에 살고 있는 루이즈와 데비, 그리고 나까지 5명. 생각보다 인원이 적어 가족적인 분위기에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들(?)이라 왠지 더 편안하고 좋았다. 이 사람들한테는 평소의 수줍음을 걷어내고 먼저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먼저 '컬처키친'의 사무실이기도 한 '매닝스 엠포리엄(Mannings Emporium)'으로 갔다. 반트리 타운에서 10km 정도 떨어진 발리리키라는 마을에 있는 매닝스 엠포리엄은 웨스트코크에서 생산되는 치즈와 버터, 잼, 초콜렛 등을 파는 가게인데 공정무역 커피를 취급하는 작은 카페도 겸하고 있었다. 또 와인샵은 아니지만 현지의 재료로 현지에서 숙성시킨 최상급 치즈를 와인과 곁들여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우리는 산장 같은 카페 테라스에 모여 앉아 엠포리엄의 바리스타가 내려준 따뜻한 커피를 함께 마시며 엠포리엄 주인 '발(Val)'과 어냐의 이야기를 들었다. 일종의 투어오리엔테이션이었는데, 가이드와 고객이라는 격식도, 쫓아오는 시간도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를 나누었고, 눈앞에 흐르는 맑은 강줄기와 푸른 나무들을 보며 깔깔 웃었다. 길 건너 발 아저씨 집에 가서 100년 넘은 버터기계도 보았다. 시골 삼촌집에 놀러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발 아저씨도 어냐와 함께 투어가이드로 합류, 반트리 토박이인 버스기사 아저씨까지 총 7명이 다시 미니버스에 올랐다. 미니버스는 좁고 구불구불한 숲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시선이 걷히면 아일랜드의 드넓은 평원과 스펙터클한 구름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가을걷이를 시작한 들판에는 드럼통처럼 돌돌 말린 짚단들이 조각작품처럼 놓여 있고,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아일랜드의 양과 소들이 넓은 풀밭을 마음껏 누비며 달콤한 풀들만 골라 먹는 사치를 누리고 있었다.

첫 번째 우리가 방문한 곳은 털보아저씨 해리의 치즈농장이다. 아저씨 가족이 사는 집 옆, 작은 창고만한 공간이 바로 웨스트코크 최고의 치즈메이커인 해리아저씨의 치즈들이 익어가는 곳. 이곳에서는 아직도 모든 과정이 철저히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행과 함께 들어간 치즈저장소에서는 고다, 블루, 체다 치즈 등 다양한 치즈들이 종류에 따라 각자의 맛을 내는 데 최고인 시간만큼 숙성되고 있었다. 저장소를 나와 아저씨 집으로 함께 가 아저씨가 만든 블루치즈, 일명 곰팡이치즈와 체다치즈를 맛봤다. 평소 냄새 때문에 많이 숙성된 치즈는 잘 못먹는데, 아저씨가 만든 블루치즈는 곰팡이 냄새 다음 따라오는 독특한 향기 같은 게 있었다. 씹는 동안 쿰쿰한 냄새 대신 그 향기가 서서히 입안에 퍼졌다. 치즈를 나눠 먹으며 해리아저씨가 치즈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 아저씨만의 맛있는 치즈 만드는 법을 들었다. 치즈도 맛있었지만 아저씨의 덥수룩한 수염이, 장식 없이 담백한 입담이 너무 좋아 그저 미소만 나왔다.

치즈농장을 떠나 우리는 프랑스인 쇼콜라티에가 직접 초콜릿을 만들어 파는 초콜릿가게로 갔다. 이 외떨어진 아이리쉬 오두막에서 초콜릿을 만드는 프랑스남자라니! 샘플로 나눠주는 초콜릿을 하나 집어 입속에 넣자마자 살랑살랑 녹아버린다. 존 생각이 나서 얼른 또 하나 챙겨 휴지에 싸서 주머니에 넣었다. 물론 집에 갈 때까지 남아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초콜릿가게를 떠나 점심을 먹을 레스토랑이 있는 마을까지는 하나의 커다란 계곡을 넘는 길이었다. 우리가 탄 미니버스는 탈탈탈 용을 쓰며 언덕으로, 언덕으로, 올랐다. 지대가 높아졌다는 신호인 양 맑고 온화했던 날씨가 갑자기 바뀌었다. 하늘빛은 낮게 회색으로 가라앉고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나는 버스의 왼쪽 창가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창밖을 보니 밑으로 끝없는 절벽이었다. 그 낭떠러지 같은 절벽은 다시 구릉을 타고 다시 높아 솟아 올랐다. 다시 보니 사방이 모두 그런 구릉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 마디로 장관이었다. 거친 바위산들이 여린 수풀을 옷처럼 입고 있는 형태였는데, 차가 그 위로 곤두박질칠 것만 같아 무서우면서도 보호벽 하나 없는 계곡길을 그렇게 바람과 싸우며 달리는 기분이 사뭇 짜릿했다.

계곡을 넘어 마을로 내려가는 길에는 다시 거짓말처럼 바람이 멎고 반짝 해가 났다. 3시가 다 된 시간...드디어 밥이다! 평소 배꼽시계가 정확한 나에게는 쉽지 않은 기다림이었지만, 행복하니 배고파도 짜증이 안났다. 우리가 간 곳은 버팔로 고기로 만든 햄버거가 주메뉴인 레스토랑이었지만, 신선한 야채들과 각종 견과류가 듬뿍 올라간 내 샐러드도 못지 않게 훌륭했다.
이제 다시 반트리로 돌아갈 시간. 점심을 먹고 차를 타니 식곤증이 몰려왔다. 보통 이런 일일투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는 작정하고 잠을 자는데, 왠지 잠이 드는 게 아까워 내려앉는 눈꺼플의 무게와 싸우며 스쳐가는 모든 풍경들을 열심히 눈에, 그리고 마음에 담았다.
"마야, 너 아란 라지에서 잔다고 하지 않았어?" 어느새 졸고 있는 나를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발 아저씨가 툭툭 쳤다. "맞아요." "아, 그럼 여기서 내리면 돼!" 아저씨가 버스드라이버에게 부탁해 급히 버스를 세웠다. 아저씨가 내가 묵을 B&B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반트리 타운에서 택시를 타는 낭비를 해야 할 뻔 했다. 고마운 발 아저씨! 어냐와 일행들에게 서둘러 인사를 하고 내렸다. 그 사이 사람들에게 정이 많이 들어버렸나 보다. 작별인사를 제대로 못하고 헤어진 듯한 아쉬움에 발길이 안 떨어져 멀어지는 버스 뒷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B&B를 향해 걸어가며 어냐의 휴대폰으로 문자를 남겼다. 행복한 투어를 하게 해줘 고맙다고, 오래오래 못 잊을 것 같다고...반트리에 다시 오게 되면 연락하겠다고. '역시 웨스트코크에 오기로 결정한 건 잘한 일이야..아주 잘한 일!'이라 생각하며  아란 라지 입구로 들어서는데, 저 만큼 주인인 듯한 남자가 나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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