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Drury Street, Dublin2, Ireland
햇빛이 눈부신 창가, 나는 하늘색 나무 받침대 위에 골라 담은 샐러드박스를 올려놓는다. 테이크아웃 전용 샐러드바라서 테이블은 없고, 문 앞에 벤치 하나, 창가에 서서 먹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다. 렌틸콩시금치스튜와 찐 메밀, 당근무우 샐러드, 검정콩케일 샐러드, 빨간무사과 샐러드, 녹두국수 샐러드 조금씩, 싹 틔운 병아리콩과 구운두부 한 조각. 내 샐러드박스 안은 24색 크레파스 색깔처럼 다채롭다. 서너 명이 옹기종기 붙어 서서 알록달록한 야채들을 맛있게 씹는다. 넉살 좋은 아일랜드 사람들은 처음 보는 옆 사람과 말을 섞으며 먹기도 한다. 물론 누가 말을 먼저 시키지 않는 한, 내 눈은 주로 내 샐러드박스 속이나 창밖의 어떤 곳을 향해 있지만. 간간히 2층 부엌에서 ‘타닥타닥’ 야채 써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칼이 도마에 닿으며 만들어내는 경쾌한 리듬이 참 좋다. 듣고 있으면 은근 행복해진다. 나랑 존도 집에서 매일 야채를 썰지만 신기하게도 항상 떠오르는 장면은 어린 시절 엄마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시던 모습이다.
블레이징 샐러드는 강남의 쇼핑중심가 그라프튼 스트리트 옆 길, 힙한 레스토랑, 카페, 상점들이 몰려 있는 드루리 스트리트에 있다. 늘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인데다 간판도, 공간도 조그마해서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자리를 18년째 지키고 있는 채식레스토랑의 터줏대감으로, 더블린에 사는 채식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다. 혼자 점심 먹을 때가 많은 나에게 이 작은 식당은 가장 편하고 간단하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다. 직접 담은 음식 무게에 따라 가격을 매기기 때문에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도, 먹을 만큼만 담으니 음식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좋다.날씨가 추워지면 오다가다 이곳에 들러 작은 스프 한 그릇을 사먹곤 한다. 뜨거운 스프를 호호 불어 먹으면 차가운 속이 이내 달래진다. 나는 재료를 형체 없이 갈아 만든 진한 스프보다 야채건더기가 살아 있는 맑은 스프를 더 좋아한다. 한국의 국처럼 뜨거운 국물을 넘길 때 ‘시원하다’는 느낌이 좋달까. 그런데 매일 바뀌는 이곳의 스프 중 하나는 보통 맑은 건더기 스프다! 사실 전통적으로 스튜처럼 진한 스프를 좋아하는 아일랜드에서 찾기 쉽지 않은 종류의 스프라, 이런 스프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주저 없이 블레이징 샐러드의 단골이 되었다. 게다가 ‘불타는 샐러드‘라는 뜻의 명쾌한 이름과 이름 옆에 그려진 불타는 듯 붉고 날씬한 당근의 발랄한 자태도 제법 마음에 든다.
10평 남짓한 작은 공간은 다양한 종류의 채식 코너로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10여 가지의 샐러드를 골라 담을 수 있는 샐러드 바, 옆쪽으로는 음료수, 팔라펠 랩 등이 진열된 냉장코너, 맞은편에는 커리나 스튜, 익힌 야채류가 놓이는 핫푸드 코너... 그 중에서도 블레이징 샐러드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카운터 쪽에 있는 ‘테이크아웃‘ 델리코너다. 렌틸콩과 현미, 검정콩과 수수 등의 조합으로 만든 버거패티와 조각피자, 사모사, 스프링롤 등 다른 채식레스토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스낵류와 설탕 대신 아가베시럽이나 메이플시럽으로 맛을 낸 건강한 디저트 종류까지, 뭐 한 가지 맛있어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 블레이징 샐러드의 주인이지 헤드쉐프인 바바라는 ‘채식’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전무했던 1980년대 더블린에 이 공간을 열었다. 채식인 부모 밑에서 늘 좋은 재료로 요리한 집밥을 먹으며 자란 덕에 자연스럽게 채식을 생활화하게 되었다는 그는, 가능한 한 유기농 재료를 사용하고 설탕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솔직히 입맛은 순전히 개개인의 취향이지만, 신선하고 건강한 재료의 맛은 음식을 대하는 마음을 너그럽게 해준다. 입맛이 취향에 딱 안 맞더라도 음식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다시 찾게 된다. 그리고 블레이징 샐러드는 내가 8년째 그런 믿음으로 찾아가는 넘버1 단골음식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