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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May 22. 2018

원칙에 충실한 건강음식 ‘Blazing Salads’

42 Drury Street, Dublin2, Ireland

햇빛이 눈부신 창가, 나는 하늘색 나무 받침대 위에 골라 담은 샐러드박스를 올려놓는다. 테이크아웃 전용 샐러드바라서 테이블은 없고, 문 앞에 벤치 하나, 창가에 서서 먹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다. 렌틸콩시금치스튜와 찐 메밀, 당근무우 샐러드, 검정콩케일 샐러드, 빨간무사과 샐러드, 녹두국수 샐러드 조금씩, 싹 틔운 병아리콩과 구운두부 한 조각. 내 샐러드박스 안은 24색 크레파스 색깔처럼 다채롭다. 서너 명이 옹기종기 붙어 서서 알록달록한 야채들을 맛있게 씹는다. 넉살 좋은 아일랜드 사람들은 처음 보는 옆 사람과 말을 섞으며 먹기도 한다. 물론 누가 말을 먼저 시키지 않는 한, 내 눈은 주로 내 샐러드박스 속이나 창밖의 어떤 곳을 향해 있지만. 간간히 2층 부엌에서 ‘타닥타닥’ 야채 써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칼이 도마에 닿으며 만들어내는 경쾌한 리듬이 참 좋다. 듣고 있으면 은근 행복해진다. 나랑 존도 집에서 매일 야채를 썰지만 신기하게도 항상 떠오르는 장면은 어린 시절 엄마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시던 모습이다.



블레이징 샐러드는 강남의 쇼핑중심가 그라프튼 스트리트 옆 길, 힙한 레스토랑, 카페, 상점들이 몰려 있는 드루리 스트리트에 있다. 늘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인데다 간판도, 공간도 조그마해서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자리를 18년째 지키고 있는 채식레스토랑의 터줏대감으로, 더블린에 사는 채식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다. 혼자 점심 먹을 때가 많은 나에게 이 작은 식당은 가장 편하고 간단하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다. 직접 담은 음식 무게에 따라 가격을 매기기 때문에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도, 먹을 만큼만 담으니 음식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좋다.날씨가 추워지면 오다가다 이곳에 들러 작은 스프 한 그릇을 사먹곤 한다. 뜨거운 스프를 호호 불어 먹으면 차가운 속이 이내 달래진다. 나는 재료를 형체 없이 갈아 만든 진한 스프보다 야채건더기가 살아 있는 맑은 스프를 더 좋아한다. 한국의 국처럼 뜨거운 국물을 넘길 때 ‘시원하다’는 느낌이 좋달까. 그런데 매일 바뀌는 이곳의 스프 중 하나는 보통 맑은 건더기 스프다! 사실 전통적으로 스튜처럼 진한 스프를 좋아하는 아일랜드에서 찾기 쉽지 않은 종류의 스프라, 이런 스프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주저 없이 블레이징 샐러드의 단골이 되었다. 게다가 ‘불타는 샐러드‘라는 뜻의 명쾌한 이름과 이름 옆에 그려진 불타는 듯 붉고 날씬한 당근의 발랄한 자태도 제법 마음에 든다.


10평 남짓한 작은 공간은 다양한 종류의 채식 코너로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10여 가지의 샐러드를 골라 담을 수 있는 샐러드 바, 옆쪽으로는 음료수, 팔라펠 랩 등이 진열된 냉장코너, 맞은편에는 커리나 스튜, 익힌 야채류가 놓이는 핫푸드 코너... 그 중에서도 블레이징 샐러드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카운터 쪽에 있는 ‘테이크아웃‘ 델리코너다. 렌틸콩과 현미, 검정콩과 수수 등의 조합으로 만든 버거패티와 조각피자, 사모사, 스프링롤 등 다른 채식레스토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스낵류와 설탕 대신 아가베시럽이나 메이플시럽으로 맛을 낸 건강한 디저트 종류까지, 뭐 한 가지 맛있어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 블레이징 샐러드의 주인이지 헤드쉐프인 바바라는 ‘채식’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전무했던 1980년대 더블린에 이 공간을 열었다. 채식인 부모 밑에서 늘 좋은 재료로 요리한 집밥을 먹으며 자란 덕에 자연스럽게 채식을 생활화하게 되었다는 그는, 가능한 한 유기농 재료를 사용하고 설탕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솔직히 입맛은 순전히 개개인의 취향이지만, 신선하고 건강한 재료의 맛은 음식을 대하는 마음을 너그럽게 해준다. 입맛이 취향에 딱 안 맞더라도 음식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다시 찾게 된다. 그리고 블레이징 샐러드는 내가 8년째 그런 믿음으로 찾아가는 넘버1 단골음식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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