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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Mar 06. 2018

눈보라에 갇히다

아일랜드에 찾아온 낯선 봄소식

지난 화요일 저녁부터 시작된 눈보라가 점점 거세지면서 이틀 뒤인 목요일, 드디어 아일랜드 전역에 기상적색경보가 발효되었다. 러시아에서 발생한 폭풍 ‘엠마’의 영향이라 했다. 3월 첫날 봄소식 대신 동장군 소식이라니, 기나긴 겨울을 견디며 3월을 기다렸던 나에게는 슬프고 기괴한 3월의 시작이었다. 현재 기세등등하게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는 엠마는 서쪽 끝 작은 섬나라 아일랜드를 통째로 삼켜버린 듯했다. 평소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아일랜드에 보란 듯이 눈다발을 쏟아부으면서.

눈보라가 시작된 화요일 저녁, 존과 나는 더블린에서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가끔 평일 중 하루를 ‘작심하고 노는 날‘로 정해 데이트를 즐긴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연극이나 영화, 콘서트를 보고, 펍에서 맥주를 마시고 시내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지난 화요일이 바로 그날이었다. 한 레스토랑에서 보내준 내 생일기념 무료식사권으로 거나한 저녁을 먹은 후, 미국 피겨스케이트 선수였던 토냐 하딩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아이, 토냐>를 보고 영화관을 나오는데, 굵은 눈송이들이 우박처럼 후둑후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밤도 늦고 날씨도 너무 추워 맥주 생각은 접고 호텔로 바로 가기로 했다. 다행히 걸어서 3분 거리에 우리가 묵을 호텔이 있었다. 호텔방에서 몸을 녹이며 텔레비전을 보는데, 뉴스채널마다 날씨경보에 대한 소식이다. 한주 내내 심한 눈보라가 예상되며 모든 학교가 문을 닫을 예정이라 했다.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하던 존이 불쑥 나에게 휴대폰을 내민다. “이것 봐! 보스한테 온 메시지야. 이번 주 수업 다 취소됐대!” 들뜬 목소리. 날씨야 어떻든 일단 회사를 안 가도 되니 신나는 건 당연하다.

다음날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 뜨거운 샤워를 했다. 커튼을 걷고 흰 눈으로 덮인 거리를 내려다 봤다. 온통 눈세상. 리피강을 건너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거북이처럼 느리다. 뉴스를 보던 존이 ‘오후부터 눈보라가 점점 더 심해질 거‘라는 일기예보를 전해준다. “도로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빨리 집에 가는 편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우리는 호텔식당에서 조식을 먹고 브레이로 출발했다. 슈퍼마켓에 들러 간단히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존의 휴대폰이 울렸다. 통화를 마친 존이 지금 일하러 가야한다고 알려준다. “산드라가 오늘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일할 수 있냐고 해서 하겠다고 했어. 교도소 수업이 취소돼서 시간이 생겼으니 이 참에 알바 좀 하지 뭐.“ 산드라는 블랙락컬리지의 헤드쉐프다. 존이 컬리지 쉐프 일을 그만 둔 뒤에도 파트타임 건수가 생기면 존에게 연락을 주곤 한다. 회사 안 간다고 그렇게 좋아하더니, 부활절휴가 때 필요한 여행경비 마련하겠다고 애쓰는 그가 안쓰럽고, 또 미안했다. 날씨 때문에 출퇴근이 어려울 것을 예상해 학교 안에 있는 직원용 숙소를 제공해 준다고 했다. 존에게는 다행한 일이지만 나는 졸지에 며칠 동안 혼자 집에 갇혀 지내게 생겼다. ‘숙소에서 같이 지낼 수 있나 알아보고 다음날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존이 집을 나섰다. 갑자기 혼자 남은 집이 유난히 횡했다. 나는 침실의 히터와 전기장판 스위치를 켜고, 침대에 걸터앉아 혼자 집에 있는 동안 할 것들을 생각했다. ‘책 원고 작업에 집중할 좋은 기회야. 며칠 전 산 소설책도 읽고, 봄맞이 옷정리랑 집안 대청소도 해야지.’

목요일. 이른 저녁을 먹고 침대에서 네플릭스로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었나 보다. 아침에 눈을 뜨니 스탠드불이 그대로 켜져 있었다. 존이 봤으면 한 마디 했을 텐데.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늘 6시면 자동으로 눈을 뜨는데, 옆에서 자던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일상이 쉽게 깨지는 것이 신기하다. 조용한 식당에서 혼자 아침을 먹는다. 습관이란 건 무서워서, 혼자 간단히 먹으면 되는 걸 평소처럼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이것저것 꺼내 식탁 위에 펼쳐놓는다. 된장국도 데우고, 빵도 굽는다. 어제 저녁에 먹고 한 젓가락 남은 현미국수도 먹어치워야 할 것 같아 꺼내면서 된장국에 말아먹으면 되겠다 생각한다. 그러면 김치가 필요하겠다 싶어 김치도 꺼낸다. 구워진 빵이 토스트기에서 튀어 오르는 순간 된장국이 끓기 시작한다. 나는 분주하게 식당을 오가며 아침식탁을 차린 후 의자에 앉는다. 그런데 문득 식욕이 사라진 것을 느낀다.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강한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뒤엉켜 하늘을 온통 뿌옜다. 3월의 첫날이었다.

금요일 아침, 눈보라는 여전히 그칠 생각이 없다. 아파트 앞에 주차된 차들은 곧 눈 속에 파묻힐 기세다. 왠지 무서웠다. 한국에 살 때는 겨울마다 이런 날씨를 태연하게 경험했으면서 왜 지금은 두려움을 느끼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신선한 공기도 마시고 몸을 좀 움직이면 기분전환도 될 것 같았다. 오랜만에 카페에서 따듯한 커피 한잔 놓고 앉아 글 쓰고 책 읽을 생각을 하니 슬슬 기분이 좋아졌다. 강한 맞바람과 싸우며 미끄러운 빙판길을 기어가듯 걸어서 20분. 하지만 힘들게 도착한 카페 에는 ‘기상악화로 금일휴업’이라고 적힌 메모가 붙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왔던 길을 오롯이 되돌아 집에 왔다. 나는 오전 내내 정서불안증에 걸린 사람처럼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과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증 사이, 혼자만의 자유와 혼자 남은 외로움 사이, 동화처럼 아름다운 설경과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는 자연의 위협 사이에서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카카오톡으로 한국의 가족들에게 폭설 소식을 알렸더니 ‘조용한 집에서 글 쓰면 되겠네‘ 하고, 존이랑 통화할 때도 ‘글 잘 써질 거야’ 하는데, 사실 이틀째 글이란 건 한 줄도 못쓰고 있었다. 책을 펼쳐도 글자가 눈에 잘 안 들어왔다.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나는 뜨듯한 침대 위에 기댄 채 옛날 고리짝 <프렌즈> 시리즈를 연속해서 보며 감자칩, 아몬드버터, 초콜릿 따위를 계속 주섬거렸다. 오후 2시쯤 존에게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나를 데리러 오는 건 무리라는 얘기를 할 줄 알았는데, 지금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내가 약속했잖아.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데리러 간다고. 1시간쯤 걸릴 거야. 짐 싸놓고 기다려!” 전화를 끊고 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 흘렀다. 존은 성에 갇힌 나를 구하러 오는 왕자였다. 나는 서둘러 집안정리를 간단히 한 후, 보스턴백을 꺼내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 넣었다. 지난 3일 동안 정처 없이 떠돌던 내 마음이 그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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