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의 고국 방문기

#1. 마주치는 모든 것이 처음인 듯

by Maya Lee

이제 10월인데...덥다!

어제 늦은 오후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를 맞아준 것은 한때 익숙했던, 그러나 지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습한 기운과 온화한 공기였다. 아일랜드의 여름보다 더 따뜻한 기온이다. 한국의 가을이 전에도 이랬던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고국 방문인데, 나는 한국의 가을날씨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낑낑 대고 들고온 트렁크 속의 기모후디, 울 가디건과 스웨터는 다 도로 가져가야 할 판. 당장 반팔 티셔츠라도 하나 사입어야 할 것 같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엄마는 나에게 깜짝 선물이었다. 나오신다는 얘기도 없었고, 내가 나오지 마시라 했었고, 전에도 한국에 올 때는 늘 혼자 집까지 가곤 했으니까. 말로는 '짐이 혼자 들기 너무 무거울까봐'라고 하셨지만, 나는 엄마의 표정에서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 혼자 지내며 느꼈을 외로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본다.

새로운 달이 시작되는 10월 1일. 내가 비행기표를 살 때 이 날짜를 의도했던가? 그냥 달이 바뀌었을 뿐인데, 이번 한국 방문이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의 가을. 10월 한국행을 욕심낸 건 잘한 일이다. 앞으로 한달 간은 우산을 챙기지 않아도, 검정색 방수점퍼를 입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신나는지! 꼭 팔랑팔랑 원피스를 입고 친구를 만나러 가야지.


엄마와 함께 공항버스를 타고 은평뉴타운의 부모님댁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쉼 없이 재잘거리며, 나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이런 수다를 그리워했는지, 내 심장의 박동을 통해 깨닫는다. SK텔레콤, 김밥천국, ABC마트, 파란버스, 녹색버스...창밖으로는 반가운 간판들과 물체들이 지나가고, 증산동, 불광동, 연신내....늘 버스를 타고 지나다녔던 동네의 거리들이 나를 지나쳐 갔다.

나의 집. 엄밀이 말하면 부모님의 집이지만, 내가 아일랜드로 이사한 이후, 한국에 올 때마다 아무런 사전 허락 필요 없이 내 집처럼 머무는 한국의 내 은신처. 내 방으로 직행해 커다란 트렁크를 먼저 떨궈놓고 편한 집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드디어 한국에 왔다는 게 실감났다. 내가 참 머나먼 곳에 살고 있다는 것도.

아일랜드의 서늘한 집에 익숙해진 나에게 한국의 온돌방은 너무 따뜻해서 살짝 답답하게까지 느껴졌다. 체질까지 아일랜드 환경에 맞게 변해버린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의 생존본능 같은 걸지도. 엄마와 둘이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기내식을 먹어서 저녁밥은 필요없겠다 했는데, 웬걸, 엄마가 나를 위해 끓여놓으신 청국장을 보자마자 다시 식욕이 돌았다. 게다가 그립고도 그리웠던 각종 나물들...가지나물, 깻잎나물, 시금치나물, 콩나물에 매콤새콤한 오이지무침까지! 깔끔하게 한상 비워내고, 아일랜드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한국 배와 호박고구마 반쪽까지 후식으로 먹고 나니 기분 좋게 배가 불렀다. 그리웠던 집밥의 위력. 엄마 옆 빈 자리에 아빠가 함께 계셨다면 난 덜 편안하고 덜 자유로웠을 텐데, 그래도 더 좋았을까...


벌써 10월2일. 하루가 지났다. 시차 때문에 잠이 잘 안 오면 어쩌나 했는데, 워낙 피곤했던 탓인지 열심히 꿈나라를 헤맸다. 눈을 떴을 때 눈에 들어온 방안의 모습과 누운 등 아래 느껴지는 침대의 질감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지만, 이내 깊은 평온을 느꼈다. 나의 친정집. 나의 탄생 이전부터 나를 사랑한 '엄마'가 있는 곳. 엄마가 계시지 않았어도 내가 이만큼 한국을 그리워했을지, 잘 모르겠다.

샤워를 하고 어젯밤 트렁크 채 부려놓았던 옷가지, 물건들을 서랍에 넣어 정리하며, 한달간 이곳에 머물 채비를 했다. 다음 순서는 1년 동안 손대지 않은 머리를 정리하러 홍대로 고고씽! 당장 펌도 염색도 하고 싶었지만, 심각하게 손상되어 가는 모발을 생각해 염색은 건너뛰고, 펌은 아일랜드 돌아가기 바로 전 하려고 미뤄두고, 머리를 다듬기만 했다. 혼자서는 눈썹 손질도 하나 못하는 메이크업 잼병인 나는 이렇게 헤어숍에 올 때나마 애꿎게 바쁜 헤어디자이너를 붙잡고 '눈썹정리'를 부탁한다. 머리를 드라이어로 쪽쪽 펴주신 덕분에 눈썹까지 가지런해진 차분한 생머리 여학생이 되어 헤어숍을 나섰다.

결혼 전 상수역과 합정역 주변에서 4년을 혼자 살았던지라 홍대는 나에게는 솔로시절의 고향과도 같은 곳. 작은 오피스텔에서 프리랜서로 글을 쓰며 혼자 살았던, 한없이 자유롭고 또 철저히 홀로였던 그때를 추억하며 골목골목을 걸었다. 결혼 후 사랑하는 사람과 아일랜드에 살며 충분히 행복하기에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이란 늘 그립고 아련한 법. 그래서 한국에 올 때마다 제일 먼저 가게 된다.

1년도 채 안 되었는데 홍대는 또 엄청나게 변해 있다. 새로운 음식점과 카페들이 들어서고, 복잡해지고 세련돼졌으며, 더 젊어졌다.(내가 늙은 거겠지) 솔직히 이런 변화가 반가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비판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건 나같은 이방인에겐 이제 사치다. 그저 내가 다시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엄마와 함께 나누는 밥상은 내 한국방문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므로, 해지는 오후 홍대의 골목을 나와 난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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